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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중엽∼말엽 인물중심>(48) 전봉준(하) - 유홍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일군의 서울 돌입>
1894년7월23일 일본공사 대조규개는 우세한 일본군을 이끌고 서울에 돌입하여 단독으로 내정개혁을 단행(갑오경장)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청일 양국은 교전상태에 들어가 소위 청·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일본의 군사행동에 분개한 전봉준은 스스로 양호창의 영수가 되어 남접을 통할하고 북접의 통영 계승희와 합세하여 거국적인 기포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894년9월 10만의 동학 농민 군이 궐기하였다. 그 목적은 항일구국에 있었다.
그들의 세력이 미치는 삼남일대에는「집강소」라는 민정기관을 설치하여 폐정개혁을 단행하고 전봉준이「대도소」에서 직접 이를 지휘하였다. 개혁의 진행은 온건적인 북접에 비하여 전봉준이 거느린 과격한 남접의 관할지역에서 철거하였다.

<일의 악랄한 보복>
정부는 양호순 무사 신정희의 관군을, 일본은 남소사랑(미나미시로)소좌가 거느리는 독립 19대대를 각각 파견하여 난을 진압하도록 했다.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은 우금치·이천·이보·봉황산 등지에서 농민 군과 접전하였다. 그러나 훈련된 일본군의 많은 희생을 내고 패주 할뿐이었다. 치밀한 일본군의 작전에 몰리어 패잔 농민 군은 뿔뿔이 해산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 발전한 갑오농민혁명은 차제에 진압되고 무서운 보복과 살육이 뒤따랐다.
전봉준은 손화중·김덕명·최경선 등의 혁명지도자들과 함께 복흥산 속에 있는 피노리에서 재거를 도모하다가 지방민의 불의의 습격을 받아 체포되었다. 그의 목에는 1천냥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의 심문을 받고 1895년3월29일 42세를 일기로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나라의 역사를 일보 전진시킬 수 있었던 거족적인 민중운동은 잔악한 일제의 간섭으로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좌절된 「보국안민」>
전봉준의 일생은 착취와 억압 속에서 신음하던 19세기 농민들의 자각과 반발을 집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봉건적인 구곡을 탈피하고 새 역사를 창조하기 위하여 외세의 침탈아래 쓰러져 가는 조국을 구출하기 위하여 피로써 투쟁하였다. 이것은 전형적인 민주혁명이었다.
「반봉건」「반외세」는 근대화로 지향하는 역사적인「슬로건」이었다. 전봉준은 이러한「슬로건」을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역사의 조류 속에 용감히 뛰어든 한말의 훌륭한 혁명지도자였다. 그가 지도한 농민혁명이 비록 실패하기는 하였으나 그들이 내 건「제폭구민」「보국안민」「근위근양」의 구호는 민족의 생동하는「비전」을 보여 주었다고 하겠다. <문박·대구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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