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화장(化粧)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2면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마한의 남자들은 때로 문신을 했다(『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 낙랑의 고분에서 출토된 대나무상자에는 이마를 넓히려 머리카락을 뽑고, 눈썹을 굵고 진하게 그린 인물이 표현돼 있다. 일본의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1715)』엔 백제로부터 화장품 제조기술과 화장기술을 익혀 비로소 화장을 했다고 기록돼 있다. 신분에 따라 사치의 위계를 정해놓기도 했다. 『삼국사기』엔 “흥덕왕 9년(834), 진골 여인의 슬슬전(瑟瑟鈿·터키석)과 대모(玳瑁·바다거북 등딱지)로 만든 빗 사용을 금하고, 6두품 여인의 슬슬전 빗 사용을 금하는 복식 규정을 내렸다”고 적혀 있다.

대한제국은제이화문분합, 19세기 후반, 지름 5.6㎝, 전체높이 3.0㎝. [사진 코리아나 화장박물관]

 역사의 조각들을 모으니 우리 ‘꾸밈’의 역사가 장구하다. 고구려 고분 쌍영총(雙楹塚) 벽화엔 이미 연지 바른 여인이 등장한다. 오늘의 작품은 대한제국 은제이화문분합(銀製李花紋粉盒), 얼굴 없는 공예품이다. 스러져가는 제국의 황실 여인은 이 분합으로 얼굴을 단장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를 위해 은으로 분합을 만들고 법랑(琺瑯) 장식을 한 이름 모를 장인도 한번 상상해 보시라.

 뚜껑 한가운데는 황실의 문장인 오얏꽃(자두꽃)이 자리잡고 있으며, 주변에 법랑으로 박쥐 세 마리를 둘렀다. 옆면엔 수복강녕(壽福康寧) 넉 자를 둘레둘레 새겼다. 분합은 서울 신사동 코리아나 화장박물관 소장품이다. 관장은 유상옥 코리아나 화장품 회장. 그는 지난 40여 년간 화장용구, 비녀와 노리개 등 여성의 꾸밈과 관련된 민속품을 수집해 왔다. 이 박물관은 현재 개관 10주년 특별전 ‘명품’을 열고 있다. 전시장에 오밀조밀 놓여 있는 화장도구들을 보면, 모으기도 그 정체를 밝혀내기도 쉽지 않았겠구나 싶다. 역사의 주변부에 있던 것들이라 기록이 마땅치도, 이것만을 작심하고 연구하는 전문가도 드물었을 터다. 박물관 이지선 학예사는 “작은 도자를 접했을 때 이것이 명기(明器)냐 화장용기냐 하는 것부터 가리기 어려웠다”며 “복식사·도자사 연구자들에게 두루 자문을 구했고, 화장하는 모습을 그린 민화나 옛 문헌의 관련된 부분을 샅샅이 뒤졌다”고 말했다. ‘명기’는 망자가 쓰던 생활 자기류를 실물보다 작게 상징적으로 만든 부장품이다.

 대한제국의 분합은 현재 런던에 가 있다. 주영 한국문화원에서 7일까지 전시된다. 고려의 청자상감모자합(큰 합과 작은 합으로 이뤄져 분과 연지 등을 담는 화장용기) 등 142점과 함께 한국의 화장문화를 알리고 있다. 파리·베이징에 이은 이 박물관 유물의 세 번째 해외 나들이다.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