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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대의사·박사·외세 현실에의 깊은 관심 - 김치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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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정인의<미로>는 응축된 문체로, 삽화적인 수법을 사용하면서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사용된 삽화적인 것들은 약간 몽롱한 것 같지만, 투철한 주인공의 의식 상태를 통하여 통일화하고 있어 이 작품의 성공에 기여하고 있다.
주인공 <나>는 이 소설에서 이 사회의 토론될만한 몇몇 상황을 상징적으로 분석해 보이고 있다.
그가 맨 처음에 군인들의 대열에 휩싸이는 것은 현대사에서, 특히 후진국의 현대사에서 군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어느 만큼 중요한가를 말해준다.
주인공이 군인이나 학교나 제단이나 「심포지엄」 등을 보게되는 것은 작가가 현실을 관계개념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자신과 관계된 현실만을 끌어들인 결과일 것이다. 복도의 미끄럼틀처럼 학교란 사회에 대한 순응책만을 가르쳐 주는 기관으로 나타나고, 그리하여 교육책을 고육책으로 바꿔 부르게 된다.
다음은 정치의 표상으로 보이는 제단으로 간다. 이 작품에서 삶은 돼지와 제주와 고수와 구경꾼들이 무엇을 표상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있다. 주의 깊은 독자는 여기에서 일찍이 「안톤 슈낙」이 말한 대의원제씨들의 귀향연설에 나타난바 있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만을 판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속임수로 이끌어가고 있는 이 제단에 강력한 항의도 해보지 못하고 슬그머니 자리를 옮긴다.
나는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생의 지주처럼 보이는 박사를 만나러 가는 도중에 「심포지엄」을 벌이고 있는 한 떼의 사람들을 만난다. 죽음이란 자살이냐 타살이냐에 관해서 관념적인 논쟁만을 거듭하는 그들에게서 나는 박사에게 가는 길을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 떠난다.
그러나 박사가 있으리라고 생각된 곳에는 오래 전에 죽은 박사의 퇴락한 고총만이 있었다.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 수많은 박사들 가운데 진짜박사는 사라지고 관념적인 공론만을 일삼는 자들만이 남아 있는 게 아닐까하는 작가의 문명비판인 것 갈다.
이 소설에서 우리는 현실을 실제개념으로 파악하느냐, 관계개념으로 파악하느냐 하는 문제를 끌어낼 수 있다. 현실을 실제개념으로 파악했을 때 현실의 사소하고 「디테일」한 면을 문제로 삼게되고 이에 대한 작가의 자세도 격렬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서정인처럼 현실을 관계개념으로 파악하려할 때 항상 현실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들고, 자신과 전체로서의 현실과의 관계를 파악하려한다.
그러므로 이 경우 항상 생의 지주로서의 어떤 것이 현실과 나 사이에 개입되게되고 생의 지주릍 찾으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나>가 살찐 사나이에게 보다 강렬하게 항의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것이 바로 현실을 관계개념으로 파악한 때문이다. 그리고 박사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하는 것이 나와 현실 사이에 개입된 생의 지주를 찾으려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생의 지주가 될만한 것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것이 발견될 수 있을까. 서정인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이 소설에서 박사를 찾지 못한 결말이 이 사실을 입증해 준다. 이렇게 되었을 경우 필연적으로 도달하는 것이 「데카르트」 적인 「코기토」의 세계인 것이다.
자아의 외부에서 찾으려했던 생의 지주를 발견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자기존재의 내면에 돌아오게 되는 것이 작가 서정인의 결론이다. 또한 이것이 현실을 관계개념으로 파악하려는 모든 지식인의 결론이다.

<자기의 생각에 관한 일>만이 자기에게 남아 있는 문제라고 한 서정인의 문학이, 문학의 사회성이라는 문제에서 더욱 논란이 되겠지만 - 현실을 실제개념으로 파악되는 것과 관계개념으로 파악되는 것 중 어느 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쉽게 단정지을 수 없으나 후자의 경우 격렬하지는 않으나 밀도 있게 우리에게 젖어 오는 것이 사실이다. 어떻게 결정되어 나타날까, 다음 작품에 기대를 걸어 볼만하다.
송영의《투계》는 닭싸움을 시키는 <종형>과 이를 피동적으로 구경하게 되는 <나>의 이야기로 닭싸움이 상징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닭싸움과 상관없이 처음부터 등장하고 있는 전도부인인 듯 한 여인에게 종형은 「프라마」 에게 퍼붓는 증오와 유사한 것을 보인다.
이 작품의 마지막에서 양 신부가 등강할 때 종형이 평소의 태도와는 달리 풀이 죽어버리는 것은 싸움에 능하게 생긴 종래의 닭들이 「프라마」 앞에서 힘없이 져버리는 작품의 「테마」 와 잘 연결되고있다. 「프라마」 와 외국 신부가 외세를 표상하고 있는 것처럼 종형과 재래종의 닭들은 한국의 현실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종형의 기이한 집념으로 재래종이 「프라마」를 이길 수 있었던 것처럼, 수천년 동안 강대한 외세에 억압되어 은 한국이 그 외세를 퇴각시키기 위해서는 특별한 집념이 필요하다는 것을 작가는 강조하고있나. 이것은 서정인의 태도와는 달리 현실을 실제개념으로 파악한 데 마론 적극적인 주강인 것이다. 처음 보는 이 작가의 장래가 기대된다.
또 다른 계열로 박상강의<하원갑달 섣달그믐>은 <말>을 잃어버린 뒤 질병에 허덕이는 섬사람들의 이야기다. 질병을 피하여 새로운 「유토피아」를 향하여 떠나는 족장 일행과<말>을 찾으려고 섬에 남은 점쇠 이야기는 두 가지 형태로 구분 지을 수 있다.
그 한가지 형태로 나타난 이 소설에서 보다 좋은 세계를 찾기 위해 당분간 고통을 참고 공동생활을 영위하려는 족장 일행은 자아를 빼앗겼기 때문에 모두 죽어간다. 이것은 사회의 일부에서 전체를 위해 자아의 일시적인 희생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그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고있다.
또 다른 형태는 섬에 남은 점쇠의 뒷이야긴데, 이 작품이<뙤약볕>의 후편인 것으로 보아서 점쇠의 뒷이야기도 나올법하다.
이들 작가들이 현실을 어떤 방법으로 파악했든, 여하튼 이들이 현실에 대해서 이처럼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좋은 현상임에 틀림없다. 어떤 방법이 옳은 것인지 뒷날 판별되게 하기 위해서도 말이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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