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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중엽∼말엽 인물중심>(42) 최초의 내각총리대신 도원 김홍집(중) - 유홍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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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소극적 대일 수교>
이 조약에 기초된 영사관 설치문제, 개항문제, 무역품목 및 관세문제, 일인의 치외법권 문제 등등이 구체화 되어감에 따라 조선 정부는 점차 기만당한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에서 일제와의 교섭은 사사건건이 의견의 대립을 이루게 되었다.
물론 이에는 조선 왕조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해외발전을 필요로 하고 또 이를 기도할이 만큼 성장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자연 대일 수교·통상에 있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데서 연유된 바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정부의 의견이 일제의 군사적인 위협으로 번번이 좌절되고 또 물질적으로도 크게 손해를 보게 되자 척 왜의 여론이 다시금 조야를 휩쓰는 가운데 척족정권은 대일교섭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때마침 청·일의 주선으로 국교를 청하여 온 미국에 대한 수교여부 또한 커다란 불안사였다.

<39세로 예조참의>
이리하여 조선정부는 난관에 부닥친 몇가지 대일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고, 아울러 국제정세에 대한 조사·연구를 꾀하고자, 제2차로 수신사의 파견을 계획하게 되었고, 이의 수행자로서 예조참의 김홍집을 발탁하였다. 이때 김홍집의 나이 39세로, 그동안 닦아온 학식과 지혜가 보람찬 열매를 맺은 영달이기는 하였으나, 비교적 순탄하게 사환하여 온 그에게 시련의 역정을 지니게 한 첫 출발이기도 하였다.
수신사에 임명된 김홍집은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는 사행을 전후하여 중국의 상해 신보, 일본의 대판일보·경도일일신문·우편지보·동경일일신문등 당시 그가 구독할 수 있었던 외국의 신문들은 세밀히 분석·검토하고, 중요관계 기사를 초록한 것이나, 일본체재 기간에 필요한 식량과 식기등을 몸소 준비한 바에서도 그 일단을 엿볼 수 있으니, 그의 「스크랩·북」「중동신문초」(이선근 박사소장)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가 발간되기 3년전의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스크랩·북」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청국 공사가 제보>
그러나 1880년7∼8월에 걸쳤던 김홍집의 수신사행은 대일 교섭에 있어 현안의 해결을 자국내에서 극력 기피하려는 일 정부의 교활한 술책으로 직접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다만 사행을 맞이한 일본의 신문들이 저마다 정부의 대한 정책을 비판하는 논조를 폈기 때문에, 대한 정책의 비의에 대한 민간의 여론을 환기시켜주는 계기를 만들게 한데 불과하였다.
그리하여 김홍집의 수신사행이 띠고 간 사명중 대일 교섭의 현안해결은 후일 변리공사 화방의질의 내조를 기다려 기하게 되었으나 국제 정세에 대한 정보수집은 주일 청국공사 하여장 과의 접촉을 통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사행은 일제가 구미제국과 맺은 불리한 조약을 개정하고자 몹시 노력하고 있다는 내막과 세계열강의 동태에 대한 세밀한 정보를 얻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정세하에서 조선정부가 취해야할 기본정책까지 교시받았던 것이다.
특히 청국공사관 참찬관 황준헌은 김홍집에게 자저의 「조선책략」을 기증하며 친중국·결일본·연미국하여 노국의 남하세력을 막고 부국강병을 꾀하라는 내용의 충고를 간절히 하였던 것이다. <문박·대구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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