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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으로 살아온 의형제의 체험기|암흑의 동굴에 사경 열 하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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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기적 같은 구사일생의 한 실화가 있다. 북제주군 구좌면 김녕리의 동굴속에서 11일간이나 길을 잃고 헤매던 두 청년의 생환. 이들은 지금 병원에 입원 가료중이다. 지난해 12월13일 북제주군 구좌면 김녕리 벌판에 위치하고 있는 만장굴 입구에는 석유횃불을 든 두 청년이 재잘거리며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올해 29세된 조영환(서울 연희동 498·서적상)과 박영환(충남 보령군 대천 출생)씨 등 두 청년이었다.
이들은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제주도 유람 차 이곳에 왔었다.

<「진풍경」에 홀려 시간가는 줄 몰라>
2일간의 제주일주 여행 끝에 그들은 「사굴」(뱀 굴)탐험에 나선 것이다.
아름다운 석주, 묘하게 생긴 단층의 자연벽화― 그런 진풍경에 홀려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이렇게 걷기를 어느덧 10시간이 되었다.
이 굴의 길이가 6천8백78「미터」나 될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1「갤런」남짓하게 들고 갔던 석유가 다 타버린 뒤에야 정신을 차려 시계를 본 것이다. 혹시 맞뚫어져 어딘가 나갈 구멍이 있으려니 하고 조금 더 나가 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훤한 광선이, 비쳤다. 환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한때―자세히 살펴보니 나갈 수 있는 구멍이 아니라 하늘에 치솟아 뚫린 구멍으로 높이가 수십 「미터」나 되어 도저히 올라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다섯갑의 성냥에「생명줄」을 걸고>
되돌아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길을 잡아줄 불이 없었다. 마침 예비로 준비한 성냥5갑이 있었다. 한 개비의 불이 겨우 3, 4 「미터」― 그리고는 또 암흑이다.
그러나 나가야 했다. 둘이서 온갖 힘을 다하여 걸어가 보았지만 겨우 몇십 「미터」―. 그러다가 그만 어디선지 아름들이 돌이 굴러 떨어져 조씨의 다리를 치고 말았다.
아이고 소리와 함께 조씨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게되었다. 박씨는 조씨를 업어다가 햇빛이 보이는 곳에 다시 내려다 놓았다. 자신만이라도 빨리 나가 조씨를 구하겠다고―.
초조와 긴장과 피로, 그리고 오한― 게다가 허기까지 겹쳤다.
『여보게, 나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세. 반드시 우리를 구해줄 기적이 생길 것일세…』조씨의 자포자기한 제안이었다.
박씨는 그럴 수가 없었다. 기적을 믿고 있다가는 꼼짝없이 죽는 길밖에 없지 않은가?
박씨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이 두 사람은 9년 전 군에 있을 때 우연히 사귀게 되었으며 「성」은 비록 다를지라도 「영환」이란 이름이 같고 나이와 성격마저 같아서 의형제를 맺었었다.

<가진 석유 떨어져 입은 옷 찢어 태워>
쓰다 남은 성냥을 살펴보니 몇 개비밖에 남지 않았다.
가지고있던 「노트」를 한 장씩 찢어 불을 비추었고 다음은 모자, 나중엔 지폐에까지 불을 당겼으며 옷도 발기발기 찢어 불을 당겼다. 이제는 불도 완전히 없어졌다. 기는 수밖에 없었다.

<어둠속을 맴돌아 온몸에 유혈낭자>
기어가다 보니 손은 빈틈없이 찢어져 유혈이 낭자하고 견디다 못해 일어서며 천장에 부딪쳐 넘어지기도 하고… 이러다 가보니 방향감각마저 잃게 되었다. 죽을힘을 다하여 나가다보면 훤한 광선이 비쳐 혹시 다 나왔나 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보면 천장 뚫린 곳으로 되돌아왔고… 다시 뒤를 돌아 몇 시간인가를 기어가다 보면 또 훤한 광선이 보이고…. 며칠 동안을 이렇게 되풀이하였던지 박씨는 기진맥진, 영영 기동할 여력이 하나도 없어 아무렇게나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 어디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난다. 친구들이 횃불을 들고 달려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또 어머니가 부축을 하여준다.
정신을 차려보면 모두가 환상이었다. 인가 하나 없는 허허벌판을 가로질러 뚫려있는 이 동굴은 두 청년을 감금한채 태연히 아무에게도 이 소식을 전하지 않고 있었다

<말치는 목동에게 우연히 목숨 건져>
목축을 본업으로 하는 김녕리의 한기섭(27)이란 청년이 있었다.
한씨는 아침을 마치고 나니 공연히 벌판에 방목하는 「말」들이 걱정이 됐다. 말을 살피러 가는 것은 한 달에 한번 꼴인데 갔다 온지 불과 1주일밖에 안되지만 웬일인지 꼭 가보고만 싶었다.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목장으로 달려갔다. 거리는 6「킬로」― 아침 7시께 였다.
말을 헤어보니 꼭 한 마리가 없다. 좌우를 살피니 말 한 마리가 만장굴의 낭떠러지로 달리고 있다.
이따금 말들이 그런 장난은 하나 놓아두면 다시 제자리로 걸어오는 법인데 이날은 유달리 그 말을 쫓아가고 싶었다.
열심히 달려가니 말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다 보니 한씨는 굴구멍 근처에 와 있었다.
이보다 앞서 한씨는 말을 쫓기 전에 공연히 돌 하나를 주워 가지고 말을 쫓았다. 그때 어디선지 사람 소리 같은 비명이 들렸다.
예부터 이 굴 구멍에는 과부가 어린애를 업고 뛰어내려 자살한 곳이 돼서 이따금씩 어린애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전설이 있었다.
한씨는 머리가 쭈삣 했다. 그러나 호기심에 용기를 내서 돌을 던져보았다. 그랬더니 『사람 살려요』하는 소리가 났다. 분명히 사람 목소리였다. 『네가 정말 사람이냐』 『네, 정말 사람입니다. 서울 사람입니다』고 대답 겸 묻는 소리가 모기 목소리만큼 들린다.

<구조대원 만나자 마귀라고 헛소리>
한씨는 『3시간만 참으시오. 내 구조대를 데리고 올 테니…』하는 말을 남겨두고 동리에 돌아와 경찰과 주민을 동원했다. 굴에 들어간 정선면씨가 밧줄로 옭아매어 조씨를 구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구출된 조씨는 『내 친구하나가 또 굴속에 있으니 살려주시오』라는 말 한마디를 남겨놓고 기절하고 말았다. 다시 굴에 들어가 청년 하나를 발견했다. 『여보시오, 정신 차리시오』라고 말을 걸었더니 『이 마귀들아, 나를 제발 괴롭히지 말아다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상대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들은 11일 동안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만 마시고 견디다가 이렇게 기적의 생환을 한 것이다. 박씨는 고향인 대천으로 내려갔고 조씨는 지금 신설동에 있는 조 외과 병원서 치료중이다. 두 다리의 일부를 절단 수술하였다. 완전 치료까지는 6개월쯤 걸린다는 것이다.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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