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 현대백화점 본점, 강남 시니어 아지트 된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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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 이후부터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현대백화점(사진)에서 친구들이랑 모임을 해요. 오전 11시쯤 5층 식당가에서 밥 먹고 근처 사는 친구 집에서 좀 놀다가 저녁 같이 해먹고 헤어져요.”

 이모(82·서초동)씨는 모임 하기 최고의 장소로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본점을 꼽았다. 교통도 편리하고 볼거리·먹거리가 한번에 해결된다는 이유로 모임이 있으면 늘 장소는 따로 정할 필요도 없이 무조건 현대백화점이다. 시간만 정해서 모인다고 한다.

 양모(83·여·압구정동)씨는 모임은 물론 생활의 대부분을 현대백화점에서 보낸다. 양씨는 백화점이 현대아파트 단지를 무료로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타거나 운동 삼아 걸어서 백화점에 간다. 지하 1층 식품관부터 시작해 6층 노천카페까지 두루 살펴보다 보면 하루가 훌쩍 간다. 양씨는 “식구들 해먹일 찬거리도 사야 해서 지하 식품관은 거의 매일 들른다”고 말했다.

 이처럼 강남 시니어가 현대백화점을 아지트로 삼는 이유는 단지 모든 게 다 갖춰진 백화점이라 편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근 갤러리아 백화점 압구정점에선 시니어를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유가 뭘까.

 여기엔 현대백화점 이외의 다른 많은 곳에서 벌어지는 시니어 기피 현상이 적잖이 작용한다. 젊은 시절 나름 잘나갔고 지금도 젊은 층보다 오히려 돈을 더 쓸 수 있는 부(富)가 있지만 단지 시니어라는 이유로 천대받는 경험이 쌓이다 보니 누구 눈치 보지 않고 맘 편히 시간을 지낼 수 있는 현대백화점으로 자연스럽게 모이게 된 것이다.

 강남 시니어가 알게 모르게 가장 괄시받는 곳은 젊은층이 많이 가는 카페다.

 김모(85·대치동)씨는 지난해 황당한 일을 겪었다. 모임이 있어 대치동 유명 고깃집에서 점심 식사를 한 후 다들 인근 유명 커피 전문점으로 몰려갔다. 자리가 있었지만 그곳 직원이 이들을 거부했다. 김씨는 “그 직원이 커피전문점 밖을 가리키며 ‘저 앞에 커피 자판기 있어요’라고 하더라”며 “너무 무안하고 불쾌했지만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냥 조용히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누구나 나이가 드는데 씁쓸했다”고 불쾌한 기억을 떠올렸다.

 김옥재(64·논현동)씨도 “카페에 가면 좋은 자리가 다 비어 있어도 늘 구석자리로 안내한다”고 했다. 그는 더 기막힌 사연을 들려줬다. “친구 아들이 논현동에서 커피전문점을 한다. 자기 돈 아니라 엄마 돈으로 하는 거다. 엄마가 모임이라도 있어 친구들과 함께 그곳에 가려고 하면 아들이 ‘오후 2시 이전엔 절대 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한단다. 카페 분위기를 흐린다고 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강남 시니어가 눈치 보지 않고 식당가나 옥상 노천카페에서 이야기 나누고 집에 가는 길에 장도 볼 수 있는 현대백화점이 강남 시니어의 아지트가 된 것이다. 편리한 교통도 한몫했다.

 박애자(86·압구정동)씨는 “젊은애들 싫다는 데 가서 눈치 볼 필요가 뭐 있나”라며 “백화점에서는 장도 보고 친구들도 만나 팥죽도 먹고 문화센터에도 가고 얼마든지 원하는 것을 한번에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성애(73·삼성동)씨도 “손주들 선물 사주고 같이 식사도 하고 커피라도 한잔 마실 수 있으려면 동선이 짧은 곳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며 “현대백화점이 이 조건에 다 들어맞는다”고 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식품관은 인근 압구정동 장년층이 주로 장보는 장소”라고 전했다. 식품관에서 만난 신모(74·압구정)씨는 “가족이 많은 것도 아니고 불과 두세 명이 먹을 거니 품질 좋은 백화점 식품에 아무래도 손이 간다”며 “조금씩 사니 대형 마트와 비교해도 크게 비싸진 않다”고 말했다.

글=안혜리·윤경희·김소엽·박형수·송정·정현진 기자 , 사진=김경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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