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스트]벤처지원금 1조8천억 결국 毒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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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머리 CBO, 로비 후유증…2년 후 ‘폭발’ 가능성도 제기 ‘벤처를 살리자는 것인가, 아니면 벤처를 망치자는 것인가.’ 지난해 지독한 자금난에 시달리던 벤처기업을 살리기 위해 정부가 만든 1조8천억원(해외프라이머리CBO 포함)의 벤처전용 프라이머리CBO(발행시장 담보부채권) 펀드의 후유증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심지어 한 창투사 사장은 “프라이머리CBO가 물을 다 흐려 놓았다”는 혹평마저 서슴지 않았다. 도대체 벤처를 돕겠다는 프라이머리CBO가 벤처를 망치는 것 아니냐는 부정적 톤으로 바뀐 이유는 무얼까. 한마디로 프라이머리CBO는 ‘눈먼 돈’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정부는 코스닥시장의 불황으로 벤처들의 자금난이 최고조에 이르자 현 정권의 최대의 치적(?)인 벤처산업을 살리기 위해 프라이머리CBO를 통해 1조6천억원의 자금을 벤처기업에 지원했다. 이 자금 규모는 2000년 한 해 동안 창투업계의 투자자금과 맞먹는 규모다.

죽어 가는 벤처를 정부 돈으로 살리겠다는 게 이 제도의 취지였던 것이다. 이 자금은 만기 3년의 사모전환사채 형식으로 발행되고 정부출자기관인 신용보증기금이 전액 보장했던 것. 프라이머리CBO를 발행하는 증권사는 발행 인수업무만 수행했다. 때문에 최악의 경우 벤처기업이 도산하더라도 정부가 공적자금으로 그 손실을 보완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눈먼 돈’에는 날파리가 꼬이고, 이를 악용하는 세력들이 생기는 법이다. 옛 동양종합금융과 대신증권이 주간사로 프라이머리CBO를 발행했던 지난해 4~6월께, 창투업계와 강남의 테헤란밸리에는 ‘3천만원이면 일주일, 5천만원이면 3일이면 된다’는 소문마저 나돌았다.

즉 로비용 자금을 주면 쉽게 이 자금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벤처를 망친 주역 중 하나인 브로커들도 가만히 있을리 없었다. 한 벤처기업 자금담당임원은 “프라이머리CBO 자금을 받게 해줄테니 5%의 수수료를 달라는 제의를 일부 벤처컨설팅회사와 투자자문사로부터 여러 번 받았다”고 얘기한다.

실제 동양현대종금을 주간사로 이뤄진 1차 CBO 발행업체 선정에서 제외된 1백47개 중소·벤처기업 사장단은 ‘동양현대종금 CBO 사태 비상대책위원회’을 결성하고 선정, 기준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며 청와대를 비롯 각 정부기관에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3차 CBO 발행 주간사였던 대우증권은 한 때 예비심사 결과 발표를 미루는 해프닝도 일어났다.

하지만 선정과정뿐만 아니라 선정된 벤처기업들의 이후 행태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일부 벤처기업들은 자신들은 정부자금(?)을 받은 기업으로 포장해 추가 펀딩에 나서기도 했다. 공신력을 이용하자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당시 투자를 위해 게임업체 G사와 접촉하고 있었던 D창투사의 한 심사팀장은 어이없는 경험을 털어놓았다. “협의 당시 G사는 감자할 예정이라며 액면가 대비 40배의 펀딩을 요구했다. 뚜렷한 수익모델을 갖고 있고 실적도 있는 회사지만 지난해만 해도 누가 40배에 투자하겠는가.

그래서 거절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그 회사 사장이 다시 찾아왔다. 프라이머리CBO를 통해 전환사채를 발행, 15배인 전환가 7천5백원(액면가 5백원)에 자금을 받았으니 이 가격으로 펀딩을 해달라고 했다. 또 거절했더니 그 사장이 그럼 15배의 반이라도 좋으니 펀딩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창투사에서 펀딩을 거절당한 회사가 프라이머리CBO를 통해 15배에 자금을 받았던 것이다.

허술한 심사로 기업가치가 과대 평가됐다는 게 창투사 관계자들의 지배적인 의견이다. 한 창투사 관계자는 “정부가 벤처기업들에게 준 보너스나 다름없었죠. 자금 내역을 살펴보면 실제 기업가치보다 2배 정도 높게 평가됐다는 게 창투사 심사역의 공통된 시각”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일부 창투사들은 아예 프라이머리CBO를 통해 자금을 조달한 기업들은 쳐다 보지 않았다.

외국계 창투사의 한 투자심사팀장은 “정부가 벤처를 살린다고 가망 없는 기업들의 기업가치를 부풀려 놓은 셈”이라며 “우리 회사는 아예 이런 기업들은 투자 대상에서 제외시켰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지난해 프라이머리CBO가 벤처 물을 다 흐려놓았다는 말이 창투업계에 쭉 퍼져 있었다.

이 자금을 받기 위한 벤처기업들의 로비도 극에 달했었다는 게 관계자들의 세평. “심사 과정 자체가 문제였다. 심사를 본사에서 총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기업이 속한 신용보증기금의 지점에서 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지점에 무슨 전문인력과 인원이 있겠는가.” 한 벤처기업 사장의 말이다.

하지만 창투업계와 벤처업계의 이런 시각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벤처기업들의 자금줄 노릇을 했던 창투사들이 투자를 꺼리는 분위기에서 벤처기업들이 상대적으로 쉽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던 프라이머리CBO 발행을 창투사들이 달가와 할리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그대로 둔다면 벤처기업들의 줄도산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정책당국이 가만히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논리다. 그는 또한 “프라이머리CBO로 자금을 조달한 기업 중 15~20%가량은 망할 것이라는 시각에도 문제가 있다”고 있다 지적한다. 즉, 프라이머리CBO는 투자부적격 업체게 투자하는 것인 만큼 일정정도의 부도 리스크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창투사들이 투자를 하면서 각종 리베이트나 신주인수권 등 옵션을 붙이는 경우가 많아 오히려 프라이머리CBO 발행을 선호했던 기업들도 많았다. 한 벤처기업 사장은 “지난해 일부 창투사들은 뒷거래 방식의 펀딩을 많이 요구해 왔다. 이럴 때 정부가 나서서 자금을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프라이머리CBO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실제 미국에서도 프라이머리CBO를 발행할 때는 ‘투자부적격 업체’ 위주로 하는 게 일반적이다. 투자부적격 업체다 보니 보증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것. 한 증권사 관계자는 “투자부적격 업체에 투자하기 위해서는 리스크 관리를 위해 자금을 풀(Pool)형태로 가져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문제는 프라이머리CBO라는 방식이 문제가 아니라 운영의 묘였다”고 지적한다.

기술신용보증기금의 시각도 이와 비슷하다. 기보측 한 관계자는 “조금만 도와 주면 더 성장할 수 있는 기업들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자그마한 부작용 때문에 큰 그림을 훼손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프라이머리CBO 방식의 벤처 자금 지원은 득(得)보다는 실(失)이 많았다는 게 전반적인 시각이다. 먼저 시장원리로 자연스럽게 벤처기업의 옥석을 구분해야 하는데 정부가 나서서 구조조정을 지연시켰다는 게 일차적인 지적이다. 한 창투사 심사팀장은 “미국에서도 벤처기업이 설립돼 나스닥까지 가는 성공확률은 1% 미만이다.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솎아져야 옥석이 구분되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프라이머리CBO는 이런 시장원리를 도외시해 오히려 벤처기업의 구조조정을 뒤로 미룬 결과를 낳은 셈”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눈먼 돈’의 부작용을 사전에 예상치 못한 정책당국의 근시안적 접근 방식도 두고두고 문제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심사과정의 투명성 부족으로 ‘로비설’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향후 ‘벤처 청문회감’이라는 지적도 서슴지 않는다. 선정 대상에서 탈락했던 한 벤처기업 사장은 “탈락 여부가 문제가 아니다. 누구라도 납득할 수 있는 투명한 심사 기준이 적용이 중요한 것이다. 투명하지 않으면 누가 뒤에서 돌봐주었냐는 소문이 날 수밖에 없다. 최근의 벤처비리에서 보듯 윗선에서 돌봐주면 정부 돈을 쉽게 받고, 그렇지 않으면 돈을 받기 어려우면 자금력이 떨어지는 벤처기업 입장에서는 윗선에 줄대는 것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토로한다.

아직까지 프라이머리CBO 발행의 후유증은 가시화되지 않고 있다. 전환사채의 만기가 3년이므로 그 결과는 앞으로 2년 후에 또렷이 드러날 것이다. 벤처비리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지만 아직도 얼마나 이런 비슷한 일이 터져 나올 지도 모를 일이다. 반면 이런 주장에 대한 반론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지난 99년 8월 2년만기로 5대 재벌을 제외한 60재벌들에게 프라이머리CBO를 처음 발행할 때도 시장에서는 난리를 쳤다.

부실기업들에게 돈을 주다가는 다 날릴 거라고 했지만 만기가 돌아온 지난해 8월 발행금액 7천7백억원 중 7천억원이 모두 상환된 선례가 있다”며 “불황기에 기업을 살리기 위한 조치였던 것 만큼 벤처전용 프라이머리CBO도 그 결과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러나 지금은 잠복돼 있는 프라이머리CBO 발행의 문제점이 언제 다시 불거질지 창투업계와 벤처업계는 주목하고 있다.

출처: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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