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믿음] 봄꽃 메시지, 무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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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호 31면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 누군가 내게 말해줬던 것이 생각난다. ‘하늘은 비로 비우고 나비는 춤으로 비운다네’. 봄은 겨우내 비웠던 일을 서서히 정리하는 계절이다. 어제 뒷산을 산책하는데 양지 녘에는 어느덧 남녘 따뜻한 바람결에 개나리의 노란 꽃잎이 뾰족뾰족 나와 있었다. 이러한 자연의 향연에 수선화 세 송이의 청초함도 창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

봄이 되면 사람들은 꽃을 보러 길을 떠난다. 꽃이 피어서 길을 떠나는가, 아니면 길을 떠나니 꽃이 피는가. 꽃을 피우는 나무들은 겨우내 많이 비우는 시간을 가진 다음 다시 채움의 시간을 갖게 된다. 세상에서 제일 가난하면서 화려한 꽃이 산벚나무다. 무관심한 비탈진 겨울산의 묵언을 고담(古談)처럼 이야기해 주는 꽃이기 때문이다. 봄은 침묵과 묵언의 시간을 보냈던 자연의 이야기들을 꽃피우는 계절로 변하여 아름다운 계절이 되고 사람도 꽃을 보면서 맑음과 향기를 닮아간다.

4월, 산모퉁이에 피었다가 바람결에 떨어지는 해 질 녘 그늘 속 산벚나무 떨어지는 꽃잎을 보라. 도를 일구는 탈속한 수행자의 모습과 같지 않은가. 꽃잎이 바람에 떨어지는 산에서 느껴지는 겸양과 고독이 보는 이의 마음을 청담하게 한다. 수년 전 충청도 속리산 자락에서 교화 개척을 할 때, 봄이 되면 이름 없는 산에 피는 산벚나무가 내 친구였다. 내면의 향기로 내 가슴을 설레게 했기 때문이다.

우리 삶은 때로 허기진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사는 것처럼 자연도 나무들의 꽃피는 계절에 의존하고 생존한다. 본능적 기쁨을 위한 사랑의 메시지도 봄 되면 더 화려하다. 사람마다 소담한 꿈과 열정도 봄이 되면 꽃을 보며 채운다. 얼마 전 따뜻한 오후 산죽바람을 일구는 낮은 처마의 찻집에서 뵌 지 오래된 선배님과 차 한 잔을 했다. 오랜만에 만나 나눈 한겨울 살아온 공부 이야기는 상념 젖은 단순한 깨달음이었다. 그 선배의 말은 “세상을 살면서 모든 게 부처 아님이 없다”는 것. 어찌 보면 내면의 고백이다. 조용히 나의 내면을 바라보니 내 마음속 동안거는 바로 ‘단순함에 대한 세상 바라보기’였음을 알게 됐다.

마음의 싹이 단순하게 움튼다는 것은 나무들이 봄꽃을 피우는 것과 다름없다. 가끔 나는 무상을 느끼기 위해서 피고 지고 갑자기 봄비에 떨어지는 꽃을 본다. 어떤 꽃도 영원함이 없듯 어떤 생명 또한 영원한 것은 없다. 그게 바로 꽃들이 전하는 메시지이고 맑은 바람 같은 향연이다.

지난주 지인하고 여수 오동도 동백꽃을 보고 왔다. 화려한 꽃은 아니지만 숨어 붉게 피는 꽃망울을 보니 애잔한 정열이 느껴졌다. ‘그리움에 지친다는 꽃’ 동백을 보러 가는 날은 공기가 쌉싸름하게 차갑고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겨우내 바닷가 바람으로 비워둔 정열의 에너지를 봄 되면 다시 채워 피워내는 붉은 꽃. 동백꽃을 보면 비운 만큼 정열적이었다가 채운 만큼 무상하게 비워 떨어지는 매력이, 어쩌면 무심하고 단순한 수행자의 모습 같았다.

봄꽃 중에 무상을 일궈내는 두 가지 꽃이 있는데 하나는 붉은 가슴으로 피는 동백꽃이고 둘은 서럽도록 화려하게 피웠다 바람 불고 비 오는 날 흔적 없이 떨어지는 벚꽃이다. 이것은 우리 삶을 아낌없이 상념에 젖게 하는 전달자의 꽃이기도 하다. 지난 시간의 얼룩으로 엮어진 현대사의 상황도, 가슴 아프게 집착하고 미워했던 내 개인의 불편한 일들도, 인연의 끈들도 마무리 짓고 이제 맑고 무심한 봄꽃 향기처럼 정리가 필요하다.



정은광 원광대학교 미술관 학예사. 미학을 전공했으며 수행과 선그림(禪畵)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마음을 소유하지 마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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