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스타] 영화배우 김승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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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안됐으면 지금 뭘 하고 있을까요"

"나이키 대리점요"

"왜요"

"체육과 나왔으니까요."

대답이 시원시원하다. 김승우(34)는 지난 연말 동료 배우들과 함께 한 송년회에서도 비슷한 말을 주고 받았다고 했다. 그가 주연한 코미디 '역전의 명수'(감독 박용운, 5월 말 개봉)를 안주 삼아 얘기했다는 것. 증권사 말단직원에서 최고의 골프스타로 인생이 1백80도 달라지는 이번 영화가 도마에 올랐다.

"박중훈 선배는 동대문 옷장사, 신현준은 난봉꾼이나 폐인, 장동건은 카페 주인, 최지우는 대기업 여비서, 송윤아는 선생님이 됐을 거라며 서로 놀려댔어요."

김승우는 그랬다. 아니, 이 같은 신상 관련성 발언을 서슴지 않다니…. 뭘 감춰두질 못하는 성격이다. 스스로 과했다는 듯 껄껄 웃었다.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증거다. 애써 꾸밀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부산역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쯤 달려 도착한 양산시의 한 골프장. 사방은 깜깜한데 클럽 하우스는 환하게 불을 켜고 있다. '역전의 명수' 촬영장이다. 실내는 온통 파티 분위기. 한국에서 최초로 열린 미국프로골프협회(PGA) 대회를 축하하는 자리다. 엑스트라가 1백여명 모였다. 서양인도 눈에 띈다.

박수 세례를 받으며 입장하는 승완(김승우). 검정색 양복을 빼 입었지만 다리는 흐느적거린다. 껄렁껄렁 고개도 흔들어댄다. 당황한 빛이 역력하다. 어깨가 훤히 드러난 상아빛 드레스를 입은 아내 지영(하지원)이 못마땅한 표정이다.

이날은 주식사기로 회사에서 퇴출될 처지에 놓였던 승완이 상류 사회에 본격 진입한 날. 우연히 터널을 지나가다 자기와 똑같이 생긴 프로골퍼와 운명이 뒤바뀐 증권사 말단직원이, 말 그대로 용이 된 것이다. 게다가 미모의 아내까지 있다. 한 남자가 상반된 세상을 넘나들며 소동을 벌이는 '역전의 명수'를 압축해놓은 장면이다.

사실 김승우는 지난해 1백30만명을 불러들인 '라이터를 켜라'에서 인생을 역전시켰다. 1990년 '장군의 아들' 이후 영화만 열다섯편에 출연했던 그가 간만에 '쨍하고 해뜰 날'을 부르며 돌아온 것이다. 3백원짜리 라이터를 찾으려고 기를 썼던 어리버리한 봉구역으로 자존심을 회복했다.

"남들은 제가 재기했다고 해요. 박중훈 선배도 제가 그로기 상태에서 일어섰다고 말하더군요. 전 동의할 수 없어요. 지난 10여년이 아무 것도 아닌가요."

그래도 그는 달라진 현실을 수용했다. 그간 영화를 보는 눈이 편협했다고 인정했다. 멋진 장면 한 두 개를 보고 작품을 고르다가 낭패를 봤다는 것. "'왜 그런 작품에 나왔어'라고 물을 땐 정말 섭섭했어요. 고만고만한 멜로영화에 나오며 매너리즘에 빠졌던 제가 문제였지만요."

여전히 솔직하다. 영화 속의 맹한 모습을 거의 찾을 수 없다. 관록은 관록인 모양이다.

"이번에도 '라이터' 이미지가 살아 있다."

"조금 그렇다. 하지만 훨씬 유머스럽고 인간적이다. 무엇보다 영화적인 영화라는 게 마음에 든다. 인생을 확 바꿔보는 것, 누구나 한번쯤 상상하지 않는가."

"프로골퍼로 나온다."

"폼은 최경주보다 좋다는 말을 듣는다. 거짓말 아니다."

"흥행배우로 불러도 되나."

"고맙다. 이글은 그렇고 버디라도 쳤으면 좋겠다."

"달라진 게 있다면."

"연기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다. 노력 하나론 용서받지 못할 나이다."

그는 틈만 나면 담배를 물었다. 하루에 세 갑을 피운다고 한다. "촬영장에만 오면 그래요. 초조하거든요. 말만 배우였던 시절, 얼마나 갑갑했겠어요." 요즘 다시 연기를 시작한다는 각오가 준비된 인삿말은 아닌 것 같았다.

양산=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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