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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주인공을 찾아서(14)자행회로 바쁜 나날 이방자 여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병구의 남편 이은씨를 따라 환국한지도 3년. 차츰 이 나라의 말과 풍속에 익숙해져 가긴 하지만 『지난 2월 윤황후의 장례 때는 어지간히 시련을 겪었다』고 방자여사는 말머리를 꺼냈다.
『장례날은 처음 당하는 까다로운 궁중의식 때문에 여간 혼나지 않았어요. 그러나 눈물겨웠던 일은 모든 국민이 그분의 마지막울 진정 슬퍼해 준 일이었어요. 그 많은 조상객…. 그 어른은 참 훌륭한 분이었죠. 자혜로우면서드 근엄하고 자랑스럽고, 「왕가의 체통」을 훌륭히 지켜왔어요. 상궁들과 더불어 손수 조상식을 차리는 등 삭망 때까지 악선재를 돌봤었다』고 방자여사는 말을 이었다.
『그땐 다리가 무처럼 퉁퉁 부었어요.』
윤황후의 상을 당하고 보니 방자여사는 『은연중 전하(남편 이은씨를 그렇게 불렀다)의 건강이 더욱 염려스러워져요』 방자여사의 얼굴에 근심스러움이 퍼졌다. 이은씨는 성모병원의 병상에서 아직도 하루 세 번씩의 영양식을 죽으로 만들어 코에 대고 주입해야만 하는 뇌혈전증의 깊은 병세.
『그렇게 라도 오래 살아 주신다면 오죽 좋겠읍니까』 46년 동안(19세때 결혼) 불운의 왕세자와 고락을 같이 해온 단심의 여사는 금방 두 손을 조아리며 남편의 장수를 간절히 소원했다. 방자여사는 이은씨를 끔찍이 위했다. 병원에선 실어증의 남편을 「휠·체어」에 태워 「베란다」의 바람을 쐬어주나 하면 손수 이발까지 시켜준다.
『전하가 객사하지 않도록 집에 모셔 왔으면 좋겠어요. 이대로면 병원에서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겠어요』 자나깨나 걱정이 사렸지만 그들에겐 지금 집이 없다. 현재 두 가정부와 함께 살고있는 한남동 「유엔·빌리지] (137호) 집은 월세 7만원의 셋집이라고 했다.
『환국할 땐 정부가 효자동 칠궁안에 사택을 한 채 지어준다고 약속까지 했었는데 지금까지 감감소식이지 뭐예요. 애들(아들 구씨와 며느리 「줄리어」여사) 이 들고 있는 악선재만 해도 주택으로선 여간 불편스럽잖아요. 게다가 정부보조비라고 어디 탐탁합니까』 좀체 입밖에 내지 않겠다던 말들을 기어이 털어내놨다.
그러나 방자여사는 「버스」를 타고 동대문시장에 「쇼핑」을 하기가 일쑤. 요즘엔 그가 이끄는 자행회활동에 한시도 쉬는 날이 없다고 했다.
『8년 전 일본에 있을 때부터 자행회를 만들었조. 지난 1월엔 동경에서 서울로 그 본부를 옮기는 일을 치렀죠. 주로 심신장애아·수재민을 돕는 일이예요. 10월28일엔 구로칠보공예품 등의 「바자」를 열어 거둔 매상금 22만원을 모두 삼성농아원. 구화학교·각심원 등의 자선단체에 도와 줬어요』 이 자행회의 활동때문에 최근 수도여사대 전복점 교수와 함께 일본의 자선단체의 시설을 둘러 보고 왔노라고 했다.
일본 황실가문의 딸로 한때 현 일본 유인천황의 배필로 물망에까지 올랐던 방자여사는 한일 간의 관계가 항상 「좋은 이웃」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일본의 사심 없는 협력태도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이해될 때 내나라 한국과 나의 모국 일본과의 관계는 진정 「좋은 이웃」이 될 거예요』 이 말은 작년 일본에 들렀을 때도 동경의 모일간신문에 소신으로 밝힌 일이 있다고 알려준다.
여사는 또 『한국여성은 일본여성에 비해 아름답고 진실성이 있으나 협동심이 약하다』 그도 가리켜 봤다. 특히 자신의 문제도 관련된 숙대분규를 계기로 해서 볼 때 여학생 스스로나 졸업생들마저 애교열이 없는 것 같다고 개탄도 했다.
『한국에선 대학을 물건다루듯 해요. 교육의 본분을 저버리고…』
이제 칠순에 가까워진 세월, 이 한 해를 보내면서 방자여사는 자신의 숱하게 파란 많았던 세월을 수기로 엮어 학원사를 통해 단행본으로 출판할 예정. 「지나간 세월」이란이름으로.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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