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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재난의 기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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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던 2년 전 3월 11일 오후 2시46분엔 일본 도쿄의 전철 안에 있었다. 도로 위 모노레일을 달리던 열차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놀이동산의 바이킹처럼 좌우로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 경험한 지진이라 무서움보단 ‘이게 뭔 일인가’ 어리둥절함이 더 컸던 그 순간에 비해, 후유증은 꽤 오래갔다. 그 후로 종종 그리고 요즘도 아주 가끔씩, 이유 없이 땅이 흔들리는 느낌과 함께 찌릿한 공포가 찾아오곤 한다.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재난이 잊히기에 2년이란 시간은 너무 짧은 모양이다. 올봄 일본에서 개봉하는 영화들을 살펴보니, 2년 전 그날을 되돌아보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제목만으로도 암울한 ‘시신, 내일을 향한 10일간’은 쓰나미로 폐허가 된 이와테현 가마이시에서 목숨을 잃은 가족과 이웃의 시신을 인양하고 DNA 채취까지 직접 해야 했던 주민들의 사연을 소재로 했다. 다큐멘터리 ‘살아남기, 미나미산리쿠 주민들의 한 해’ 역시 재난이 쓸고 간 현장에서 새로운 삶을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후나하시 아쓰시 감독의 ‘만개한 벚꽃나무 아래서’는 사고로 남편을 잃은 여인을 주인공으로 예기치 않은 재난에 직면한 이들의 절망과 죄책감을 그렸다. 지난 2월 열린 베를린영화제에도 초청돼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3·11의 여파로 수명을 다한 노래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온다. 일본 그룹 ‘사잔올스타스’가 2000년 발표해 앨범 판매 300만 장을 돌파하며 인기를 모은 ‘쓰나미(TSUNAMI)’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진 후의 ‘쓰나미 같은 쓸쓸함’을 담은 이 노래는 10여 년간 일본인들의 노래방 애창곡 톱10에 꾸준히 올랐었다. 그러나 대지진 후 방송에서도 노래방에서도 완전히 사라졌다. 인터넷언론 제이캐스트뉴스는 “재해 후 2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노래방에서 ‘쓰나미’를 부르는 건 금기”라고 전했다.

 잊지 않았다는 건 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날의 경험 덕에 지진 발생 시 행동수칙에 대해서는 눈 감고 시뮬레이션도 할 수 있게 됐다. 대중교통이 끊겨 대피소에 머물던 그날 밤, 일본인 친구가 농담처럼 물었다. “한국은 분단국이니까 이런 대피훈련 익숙하지?” “응? 글쎄….” “방공호 같은 건?” “있긴 있겠지. 근데 설마 쓸 일 생기겠어?” 그런데 요즘엔 부쩍 두려워진다. 그 ‘설마’에 기대 최소한의 준비조차 터부시한 채, 아무 일 없는 듯 살아가도 진짜 괜찮은 건지.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