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에도 女속옷 마트 들고간 청년 결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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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여성 란제리 업체 남영비비안의 김진형 사장은 말단 사원으로 입사해 12년째 이 회사를 이끌고 있는 장수 CEO다. [김도훈 기자]

스물셋에 영업사원으로 회사에 들어왔다. 2년 만에 대리가 됐다. 다시 2년 만에 과장이 됐다. 마흔일곱에 최연소 사장이 됐다. 창립 이래 첫 ‘사원’ 출신 사장이었다. 11년이 지난 지금은 ‘최장수 사장’ 기록을 하루하루 갱신하고 있다. 여성 속옷 전문 기업 남영비비안의 김진형(58) 사장의 이력이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이다. 그런 그도 입사하자마자 퇴사를 고민했었다.

 “1978년 입사 당시에는 회사가 남영나일론이었어요. 선경합섬·동양나일론 같은 원사 제조업체인 줄만 알았는데 여성 속옷 기업이었던 거죠. ‘어떻게 남자가 여자 속옷을 팔러 다니느냐’는 말에 흔들렸죠.”

 57년 설립된 남영비비안은 70~80년대 여성 속옷 단일 품목만으로 섬유수출 쿼터의 70%를 차지하는 수출 중심 기업이었다. 73년 자체 기술로 개발한 브랜드 ‘비비안’을 출시하면서 내수시장에 뛰어들었다. 김 사장이 입사하기 5년 전이다. 그의 이력은 남영비비안의 발전과 함께한다.

 “입사 3년 만에 신세계·미도파 둘밖에 없던 때 백화점 영업을 맡게 됐어요. 직영 대리점 등을 중심으로 영업하던 때라 다들 ‘좌천당했다’고 수군거렸지요. 하지만 그때 새 유통망 개척에 뛰어든 덕에 사장이 된 거죠.”

 남영비비안은 편의점·대형마트(할인점)·홈쇼핑 등 새로운 유통 채널이 등장할 때마다 업계 ‘1호’로 시장을 개척했다. 주역은 김 사장이었다.

 “90년 CU(당시 훼미리마트)가 서울 가락동 시영아파트 앞에 1호점을 냈을 때 스타킹을 납품했습니다. 한 달에 스타킹만 1200만 장 넘게 팔던 시절이에요. ‘만들면 완판’, 없어서 못 팔던 시절인데 편의점과 거래하느냐고 다 손가락질했지만 확신이 있었습니다.”

 93년 서울 도봉구 창동에 이마트가 1호점을 냈을 때도 대형마트용 브랜드를 만들어 론칭했다. 인근 백화점이 “우리와는 거래 않겠다는 것이냐”고 위협해도, 사내에서 “미친 짓”이라고 반대해도 밀어붙였다. 99년에는 홈쇼핑에도 진출했다. 남영비비안은 현재 백화점전문점용 고급 브랜드 ‘비비안’, 대형마트용 ‘드로르’, 홈쇼핑용 ‘로즈버드’ 등 다양한 브랜드로 시장을 세분하며 국내 여성 속옷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최근엔 비비안도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 여성을 위한 ‘비비안 프레시’, 좀 더 고급스럽고 우아한 디자인의 ‘비비안 꾸띄르’ 등으로 다각화했다. 현재 채널별 브랜드도 각각의 전략을 구사해 업계 1위를 굳힐 계획이다.

 김 사장은 “한때는 만들면 다 팔렸지만 이제는 우리 브랜드가 아니라도 속옷은 많다”며 “과거의 영광에 연연하지 않고 고객에게 선택과 사랑을 받겠다”고 말했다. 2011년 파격적으로 남성 모델(배우 소지섭)을 기용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가슴을 커보이게 해주는 ‘볼륨업 브라’, 봉재선이 없어 옷맵시가 깔끔한 ‘노브라’, 브래지어 어깨끈을 액세서리로 자리 잡게 한 ‘투씨브라’ 등 새 트렌드 개발도 계속된다. 김 사장은 “대·중·소밖에 없던 브래지어 사이즈가 지금은 30가지도 넘는다”며 “우리나라 여성 고객 수준에 맞추다보니 해외 브랜드보다 경쟁력이 생겼다”고 말했다.

 김 사장은 “비비안에 있는 35년 동안 창업주(남상수 명예회장)의 뜻에 따라 외환위기 때조차 단 한차례도 임금 체불이 없었다”며 “참 좋은 회사”라고 ‘사원’ 같은 웃음을 보였다.

글=구희령 기자
사진=김도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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