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한강의 기적Ⅱ, 새 정치로 열어가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글로벌 경제위기와 북한의 핵무장 위협에 짓눌리고 있는 국민에게 희망의 새 시대를 열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사는 높은 기대감을 안겨 주었다. 국민의 강한 의지와 저력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면서 ‘한강의 기적’이란 위대한 성취의 역사를 만들었다면 지금이야말로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제2의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 역사적 도전에 모두가 함께 나서자고 박 대통령은 호소했다.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꿈과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적을 또다시 이루기 위해서는 지나온 반세기를 냉철히 돌아보고 변화의 성격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50년 전에 시작된 ‘한강의 기적Ⅰ’을 위한 노력은 산업화를 최고의 목표로 삼았기에 가능했으며, 민주화는 25년 뒤에야 성취할 수 있었다. 그러한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의 상황과 여건은 우리가 ‘한강의 기적Ⅱ’를 기대하는 오늘의 형편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1960년대의 한국은 농경사회의 경제구조와 빈곤의 사슬에서 벗어나고자 근대화의 기치를 들고 산업화를 발동시켰다. 별다른 경쟁국도 없었으며 돕겠다는 우방들이 있었기에 잘살아 보겠다는 목표 하나로 국민의 힘을 모아 매진할 수 있던 시대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이 바로 그러한 전진을 가능케 했으며 ‘한강의 기적Ⅰ’은 이른바 국가자본주의적 성장모델의 성공적 실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권력의 발동에 의존하던 실험은 세계사의 주류였던 민주화의 물결에 적응하지 못하는 심각한 한계를 노출했었다. 그러기에 한국의 근대화 실험에 대한 ‘한강의 기적’이란 평가는 1987년 평화적으로 민주화에 성공한 이후에야 비로소 우리 스스로도 수용할 수 있었다.

 근대화의 성공을 발판으로 21세기 세계화된 선진시장에 참여하게 된 한국은 치열한 국제경쟁과 고령화와 저출산, 첨단기술의 변화와 고용의 감소 등 선진국형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다. 더욱이 선진사회가 잉태하기 쉬운 빈부격차 등 양극화 문제를 고조된 정치참여의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민주적으로 풀어 가느냐 하는 복합적인 과제를 떠안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에 대한 국민의 광범위한 인식은 이미 지난 대선에 임한 여야 후보들의 입장에도 역력히 반영되어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의 취임사에서 이러한 상황의 변화가 수반하는 시대적 도전에 적극 대응할 의지와 전략을 밝혔다. 국제경쟁에서 앞서가며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지름길은 과학기술과 산업, 문화와 산업이 융합하고 산업 간의 벽을 허문 창조경제와 경제민주화를 추진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이른바 소프트파워 시대에 맞는 우리 국민의 뛰어난 창의력에 집중 투자하고 우선순위를 부여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공정한 사회와 행복한 국민을 중심으로 ‘한강의 기적Ⅱ’를 만들어 가겠다는 약속은 국민의 큰 박수를 받았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그러한 도약의 가장 중요한 열쇠인 한국 정치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언급했듯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는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그에 못지않게 심각한 것은 오늘날 대의민주주의가 세계 곳곳에서 겪고 있는 파탄이다. 혼란에 휩싸인 아랍의 봄은 차치하고라도 그리스를 비롯한 남유럽 민주국가들의 정치적 불안정이나 벼랑 끝에 몰린 미국 정치의 극단적 대결구도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미 빈번하게 지적되었듯이 민주화 이후 한국에서의 민주주의 제도화 노력이나 운영 실태 역시 국민으로부터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민주정치의 위기를 외면한 채 ‘한강의 기적Ⅱ’를 기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사는 간결하고 우아하면서도 설득력이 돋보였다. 그런데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 대한 기본입장을 폭넓게 망라하고 있음에도 ‘정치’가 빠져 있어 다소 의아했다. 40여 년 전 ‘정치의 비정치화와 행정의 정치화’란 화두를 꺼냈던 일이 생각났다. 아무리 유능하고 능률적인 관료와 행정이라도 민주국가에서는 정치를 대치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창조경제를 포함한 ‘한강의 기적Ⅱ’의 청사진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정치를 비켜가는 행정만으로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더욱이 정치개혁이 시급히 요구되는 한국 민주정치의 현주소에선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산업화의 성공으로 ‘한강의 기적Ⅰ’을 일구어 냈다. 박근혜 대통령은 21세기형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공시킨 ‘한강의 기적Ⅱ’의 기수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