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해송」 할아버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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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마해송 할아버지가 6일에 돌아갔다. 뇌일혈로 갑자기 61세의 생을 마친 것이다.
1919년 문예잡지 「여광」의 동인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했고, 그 뒤로 <바위나라와 아기별><어머님의 선물> 등 동화를 발표하기 시작해서 우리 나라 아동문학의 길을 처음 터놓았다. 1924년에 소년운동단체인 「색동회」의 동인으로 어린이들의 꿈이 언제까지나 아름다울 수 있도록 어린이를 위한 문화활동에 뜻을 두어 평생을 바쳤다.
한때는 일본에서 일류잡지를 경영해서 크게 성공하여 일인으로 이름 있는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으나 친일을 하는 일이 없었다. 일제 때 우리 나라에서는 일본사람의 압박으로 이름들을 일본 투로 고쳤는데 마해송 할아버지는 끝까지 고치지 않았다.
젊어서 폣병으로 오래 고생한 일이 있었지만 꿋꿋한 정신의 힘으로 이겨내었고, 6·25때는 대구로 피난하여 아침저녁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어려운 곳에 있으면서도 부지런히 일선지구에 종군하면서 국군을 격려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가까운 벗들이 고생을 면해드릴 양으로 높은 벼슬을 권해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일본인 친구들은 난리가 난 한국에서 위험하게 지내지 말고, 일본으로 건너와 편안히 살 것을 졸라도 마다하고 스산한 피난도시 대구의 초가주막 「석류나무 집」에서 가난한 막걸리 잔으로 벗들과 시름을 달래며 대쪽처럼 살았다.
동화 <토끼와 원숭이>에서 우리 나라를 착하고 약한 토끼에 비기고 간사하고 사나운 원숭이를 일본에 비겨 우리를 괴롭히던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케 한 것이라던지 장편동화 <모래알 고금><멍멍 나그네>에서 사회의 옳지 못한 일들을 바로 잡아 보려한 날카로운 풍자는 그 인격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지금 색동처럼 아름답게 물든 단풍이 소리 없이 지고 있는 창경원 연못가에는 한 조촐한 돌비석이 섰으니 이름하여 「어린이 헌장비」라 한다.
어린이를 위해 정성껏 헌장을 초하고, 몸소 힘을 기울여 세워진 비는 평생을 이 나라 어린이를 아끼고 사랑하다가 돌아간 마해송 할아버지를 그리는 어린이들의 영롱한 슬픔이 엉기어 눈물짓고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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