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 사회주의 14년…물주 잃은 남미 좌파블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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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좌파의 기수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사망이 발표된 5일(현지시간) 좌파 지도자인 다니엘 오르테가 니카라과 대통령이 수도 마나과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차베스를 기리는 연설을 하고 있다.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부통령은 이날 차베스가 2년간 이어진 항암 치료 끝에 사망했다고 밝혔다. [마나과 로이터=뉴시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사망이 베네수엘라를 넘어 남미 정국에 소용돌이를 몰고 오고 있다. 그의 사망은 오래전 예견됐다. 지난해 10월 대통령선거에서 4선에 성공했지만 암 재발로 받은 네 번째 수술로 1월 취임식조차 치르지 못했다. 수술받기 전 차베스는 니콜라스 마두로 부통령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당장 베네수엘라는 30일 안에 재선거를 치러야 한다. 집권 베네수엘라통합사회주의당(PSUV)은 5일(현지시간) 마두로를 후보로 공식 지명했다. 마두로는 차베스가 암 투병을 하고 있던 지난해 12월 치른 주지사 선거에서 23개 주 중 20곳에서 승리를 거두며 여당 후보로서 가능성을 입증했다. 그러나 야권도 단단히 벼르고 있다. 지난해 10월 차베스와 맞붙어 돌풍을 일으켰던 야권통합연대(MUD)의 엔리케 카프릴레스의 도전이 거세다.

 이번 선거에서 카프릴레스는 차베스의 ‘퍼주기’ 석유정책을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질 것으로 보인다. 차베스는 세계 최대 석유 매장량과 세계 5위 석유 수출량에서 나오는 오일달러로 남미의 반미전선을 이끌어왔다. 심지어 쿠바는 음양으로 국내총생산(GDP)의 40%에 해당하는 원조를 받아왔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에콰도르·볼리비아·니카라과에서 좌파가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차베스의 원조가 큰 힘이 됐다.

 차베스는 14년간의 포퓰리즘 정책과 특유의 카리스마로 좌파 국가 원조에 대한 국내 불만 여론을 눌러왔다. 그러나 석유산업 국유화 정책으로 산업기반이 와해되면서 생필품 부족과 20%에 이르는 살인적인 인플레로 중산층의 이반이 심화됐다. 지난해 10월 대선에서 40대의 카프릴레스가 45% 득표율을 기록하며 차베스를 위협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차베스에 비해 대중 장악력이 약한 마두로가 퍼주기 석유정책을 그대로 밀어붙이기 어려운 이유다.

 남미 반미전선 내에서도 균열이 예고되고 있다. 차베스는 남미 독립영웅 시몬 볼리바르의 혁명 계승자를 자처해 왔다. 외세인 미국을 배격하고 남미 국가끼리의 사회주의 혁명 완성을 꿈꿨다. 그러나 지원군이었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대외개방으로 방향을 틀고 쿠바마저 개혁·개방 정책을 도입하면서 반미전선의 대오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오일달러 원조가 반미전선을 지탱해 왔지만 이마저 줄거나 끊기면 앞날을 장담하기 어렵다.

 마두로로선 당장은 반미 노선을 더 선명하게 추구할 전망이다. 그러나 일단 정권을 잡고 나면 와해 직전의 산업기반을 살리기 위해 민영화 조치를 모색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정통 사회주의 노선을 고수했던 피델 카스트로의 뒤를 이은 동생 라울이 개방정책으로 돌아서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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