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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봉 스님을 애도함(서경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여기 어두운 길을 걷는 긴 무명의 행렬이 있다. 아직 이 길이 얼마나 더 계속될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 그런데 이 행렬의 선두에 서서 행렬의 방향을 교시하던 큰 등불이 갑자기 꺼졌다. 어두운 길은 캄캄해지고 행렬은 다시 무명의 혼돈에서 서성거리고만 있다. 길을 가리켜주고 비쳐주던 등불을 잃었기 때문이다.
효봉 선사는 과연 무명의 행렬을 밝게 비쳐주는 등불이었다. 그 등불이 한 번 높이 찬란하게 비칠 때 캄캄하던 무명의 장벽은 깨끗이 걷혔고 집착의 탁류에서 난파한 중생의 미망은 삶의 길을 찾았다.
그러나 이제 이 등불이던 효봉 선사가 79세를 마지막으로 그의 사바여정을 끝마치는 순간 중생은 하나의 위대한 등불을 잃게되었다.
일찍 선사는 서북땅 평양에서 태어났다. 급격한 극대화 과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사는 한때 한아름 세속적 청운의 꿈을 안고 무지개를 찾아서 현해탄의 파도를 넘었다.
일본 동경에서 와세다대학을 마친 선사는 법원판사로서 인간의 지혜가 인간의 죄를 판가름하는 자리에 앉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한인간의 생명에 사형을 언도하였던 판결이 엄청난 오판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선사는 그리운 고향과 따뜻한 가정을 등지고 수년동안 방랑의 길을 떠났다. 한때는 엿장사 행상을 하면서 피나는 참회의 가시밭길을 편력했다.
선사가 당대의 고승 임석두 화상으로부터 사미계를 받고 금상산 선계사에서 입산수도를 결단하였을 때가 37세. 이때부터 선사의 생활은 한번 가부좌를 틀고 참선을 시작하면 대오가 있기까지는 한길로 매진하는 불퇴전의 수도행이었다.
한번 결심하면 몇 달이건 몇해건 밤낮을 가리지 않는 면벽 정진하는 선사의 모습을 보고 도반들은 <돌절구>라고 별명짓기까지 했다. 선사의 구도자다운 열정적 성품을 잘 나타내주는 별명이다. 해방후 선사는 합천 해인사의 가야총림조실로서 침체한 불교계에 새로운 선풍을 불러 일으켰고 불교정화의 기운이 싹틀 때 선사는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종풍정화의 당위>를 열변했다.
그러나 이제 히말라야에 메아리지던 불타의 말씀을 그대로 방불케하던 선사의 사자후는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말법중생이 마셔야하는 숙록의 쓴잔이라고나 할까.
이제 선사는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뒤따르게 마련이란 무상법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듯 고요히 입적했다. 남은 것은 어두운 길을 등불 없이 걸어야하는 무명 중생 뿐이다. <불교학자·동대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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