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전시 리뷰] 정기용, 그와 다시 만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2년 전 타계한 건축가 정기용. 건축의 인간성·사회성에 무게를 실어왔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르네상스 시대 지식인 조반니 루첼라이는 “인생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일은, 대를 잇고 건물을 세우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후원자였다.

 건축물이 한 세대도 못 가고 단명하기 일쑤인 한국 사회에서 남의 일처럼 들린다. 허나, 그래도 남는 게 있다. 건축물을 착안·실현하는 과정에서 협업했던 흔적과 이를 고심했던 건축가의 문헌과 도면이다. 흔히 ‘아카이브(기록·문서)’로 불린다.

 정재은 감독의 영화 ‘말하는 건축가’(2011)로 대중과 가까워진 건축가 정기용의 2주기가 다가왔다. 그는 ‘무주 프로젝트’ ‘기적의 도서관’ 등 우리 삶과 공공건축의 밀접한 관계를 입증해왔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고인을 기리는 ‘그림일기’ 전시를 지난달 28일 개막했다. 고인 및 유족이 기증한 자료 2만여 점 중 2000여 점을 추렸다. 우리 사회가 건축가를 특정 개인이 아닌 시대의 증언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사실 건축가의 아카이브는 한 시대를 증언하는 집합적 기억이다. 휘발성 정보가 지배하는 시대에 손으로 눌러 쓴 글과 그림의 가치는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전시장 입구에서 처음 만나는 부분은 연대기다. 건물처럼 벽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책이 인상적이다. 정기용 개인의 삶과 건축 철학을 구축하게 해준 인문학적 토양을 보여준다. 이어 젊은 시절에 정성스럽고 열정적으로 그려낸 오리지널 도면과 가지런히 복제된 도면이 차곡차곡 놓여있다.

 그리고 추모의 풍경, 농촌과 건축, 정기용의 도서관 그리고 영상 등 주제별 전시가 이어진다. 제주 4.3기념관 현상설계, 흙 건축에 대한 열정, 무주 프로젝트, 기적의 도서관의 순서로 전개되는 각 전시실에서 사람, 그리고 생활을 존중했던 한 건축가의 고민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각 작품을 이해하려면 오래 들여다봐야 한다. 몇 달, 몇 년간 진행한 계획안을 어떻게 단숨에 파악할 수 있으랴. 단계별로 작성된 도면을 따라가 보면 그 과정에 담긴 숱한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공공건축가 혹은 건축계의 공익요원으로 알려진 정기용의 다양한 얼굴을 만나게 된다. 그와 동시대에 함께 있었다는 기쁨과 고마움도 엄습해온다.

 굳이 아쉽다면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와 팀원들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그게 뭐 중요하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문화전위에 있는 미술관부터 큐레이터의 역할을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

 국립현대미술관은 우리 건축가들의 아카이브 구축을 확대할 예정이다.

7월 경기 과천에 연구센터가 문을 열고 11월 서울관 정보자료센터가 개관하면 새로운 차원의 아카이브 연구와 전시의 생태계가 조성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건축의 데이터베이스가 마련된다는 점에서 반갑다. 늦을 때가 가장 이른 게 아닌가. 중요한 건 황소걸음이다. 전시는 9월 22일까지. 무료. 02-2188-6000.

김일현(경희대 교수·건축학과)

◆정기용(1945∼2011)=서울대 응용미술과, 동 대학원 공예과 졸업. 프랑스 파리에서 실내건축·건축·도시계획을 전공. 1986년 기용건축 설립. 책으로 『서울·건축·도시』 『서울 이야기』 『감응의 건축』 등이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