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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모든 사랑의 발원지는 그대의 첫 눈빛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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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원규
시인

슬슬 북상하는 봄기운 따라 수분령(水分嶺)을 넘었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2박3일 동안 네 번이나 넘었다. 문학평론가 소종민씨와 소설가 윤이주씨 부부의 초청으로 청주를 다녀오고, 다음 날 대전의 <시와 경계> 문학축전에 시 낭송을 하러 다녀왔다. 가령 수분재에 빗방울 하나 내리면 그 반은 섬진강을 따라 남해로 가고, 나머지 반은 금강을 따라 서해로 간다. 가까이 금강 발원지인 뜬봉샘이 있고, 산 너머 진안에 섬진강 발원지인 데미샘이 있다. 강원도 태백의 삼수령이 동·서·남해와 물길로 서로 연결돼 있듯이 지상의 모든 고개와 발원지는 끝내 자를 수 없는 어머니의 탯줄 같은 곳이다.

 청주의 밤은 어머니의 아랫목처럼 따스하고 흐뭇했다. 남편 소종민씨가 연극 연습실로 쓰던 곳을 개조해 ‘책과 글 연구소’라는 사랑방을 만들었다. 바로 그곳에서 아내 윤이주씨의 첫 장편소설 『마음』의 출판기념회를 열었기 때문이다. 여느 기념식과 달리 아무런 격식도 갖추지 않고 오랜 인연의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와 공연을 나누었다. 지역의 화가와 소리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애지시선’이라는 좋은 시집들을 펴내는 대전의 함순례 시인, 청주의 백두대간 전문가 김하돈 시인, 안동의 시노래 싱어송라이터 위대권·강미영씨 부부 등이 어우러진 한바탕 아라리난장이었다.

 이틀 뒤 대전에서 열린 <시와 경계> 창간기념 문학축전도 성황리에 열렸다. 원로 오세영·허만하·서영춘·이명수 시인, 각 지역의 문예지 주간들과 소장파 시인들이 어울렸다. 오세영 시인이 “문학 전성시대는 목포-부산-대구-광주를 지나 지금은 대전이다”라고 한 말이 실감났다. 대전은 전국의 시도 중에서 <문학마당><애지><시와 정신> 등 가장 많은 문예지를 발간하고 있다. 소위 글로컬리즘(glocalism)의 역할을 주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아시다시피 ‘문화를 창조하고 수용하는 주체가 지역성을 뛰어넘는다’는 의미의 글로컬리즘은 글로벌리즘과 로컬리즘의 합성어다.

 해체주의나 탈중심주의의 깃발은 이미 오래전에 올랐다. 그러나 한국의 문화예술은 ‘서울 중심주의’가 판을 치는 후진국형이다. 여전히 지역의 성과에 ‘빨대’만 꽂는 서울 중심주의는 문화적 르네상스가 아니라 상업주의의 헛꽃으로서 사막화를 초래할 뿐이다.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는 ‘지역이나 개인이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 자기들의 작은 문화영지로 전 세계를 초청하는 것’이다. 모두가 앉은자리에서 각자의 발원지가 되는 것이다. 누구나 수분재가 되고 누구나 산마루가 되는 것이다. 청주와 대전에서 만난 예술인들의 열정이 그러했다. 모든 산, 모든 골에 발원지가 숨어있듯이 유명하지 않고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서울사람들이 집집마다 수도꼭지를 거슬러 오르면 그 마지막에 한강 발원지인 검룡소가 있다. 입과 내장과 항문을 지나 싱크대 하수구와 화장실 변기를 따라 내려가면 한강 하류의 서해를 만난다. 단절이 아니라 물의 네트워크이자 생명공동체다. 알고 보면 우리의 몸 또한 걸어 다니는 작은 낙동강이요, 작은 영산강이 아닌가. 관념이 아니라 바로 구체적인 현실이다. 모두가 한 몸이다. 날마다 물을 오염시키는 우리는 모두 발원지를 찾아가 참회부터 해야 한다. 그 맑은 생명수를 보며 ‘생명 본연으로서의 첫 마음’을 되찾아야 한다. 문화의 연대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언어예술의 발원지는 탯말이다. 표준어가 아니라 어머니 배 속에서 듣던 탯말로부터 미학의 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겨울 철새가 외면하는 강은 이미 강이 아니다. 단 하루라도 발원지의 생명수를 잊고 사는 한 우리는 모두 ‘어머니 강의 후레자식’이 될 수밖에 없다. 만화방창 봄나들이를 나서려면 먼저 발원지부터 가보자. 봄이 오는 길목에서 영산강 발원지인 담양군 가마골의 용소가 그립다. 태백의 황지연못과 검룡소, 장수군 신무산의 뜬봉샘, 진안군 팔공산 능선의 데미샘이 더없이 그립다. 모든 사랑의 발원지는 그대의 첫 눈빛이거나 맞잡은 손의 살가운 온기였다. 그것이 결국 대하장강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언제나 나는 너의 발원지요, 너는 나의 발원지다.

이 원 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