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자료요청 아무나 하나

중앙일보

입력

"국가정보원에서 하도 많은 자료 요청을 받다보니 그 자료를 제가 보냈는지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지난 7일 정보통신부가 2000년 7월 10일 국정원에 '패스21 지문인식기술 검토보고서'를 보낸 의혹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당시 사무관으로 이 보고서를 직접 만들었던 공무원이 한 말이다.

이 사무관뿐이 아니었다. 지휘계통상 결재라인에 있던 당시 정보보호과장.정보화기반심의관.정보화기획실장 등이 모두 입이라도 맞춘 듯 국정원에서 자료 요청을 받았거나 팩스를 보낸 사실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이유도 같았다. "자료 요청을 무수히 받다보니 보낸 날짜 등을 어떻게 일일이 알겠느냐"는 반문이었다. 정통부가 국정원에 팩스로 보낸 자료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자료 요청을 받은 공무원과 그것을 보낸 사람은 확인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미숙한 일처리를 한 정통부 공무원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자기 업무를 처리하기에도 바쁜 정통부 공무원들에게 과다하게 자료 요청을 해대는 국정원도 문제"라고 정통부의 한 관계자는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간단히 인터넷 검색만 해도 찾을 수 있는 자료까지 요청하는 경우도 있고, 정확한 사용처도 모른 채 팩스로 넣어주는 경우도 있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문제는 국정원의 불필요한 자료 요청이 업체들에 직접적으로 피해가 전가된다는 점이다. 보안업체 관계자들은 지난해 정보통신기반보호법령 정비시 당했던 고통을 지금도 기억한다. 업체의 매출액 규모부터 해외지사 자료까지 요청하는 바람에 직원들이 일손을 놓고 자료 작성에 매달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몇몇 업체는 국정원이 회사의 영업비밀을 알아내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까지 가졌다고 귀띔했다.

구설수에 휘말린 국정원이 신뢰를 회복하는 지름길은 공무원.업체에 부담을 주는 지나친 자료요구 같은 일부터 없애는 것이라는 게 많은 사람들의 지적이었다.

하지윤 기자 hj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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