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래된 포도나무 감도는 ‘시간의 향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12호 23면

이 레이블에서는 어쩐지 ‘시간의 향기’가 느껴진다. 마치 오래된 무성영화에서 흔들리는 자막과 더불어 등장하는 영상 같다. 낡은 문서 위에 모던하게 새겨진 2010이라는 숫자 아래 흘러가듯 쓰인 ‘파소피시아로’는 무슨 의미일까. 또 글자 아래에 있는, 왕관 위에 웅크리고 있는 새의 모양은.

김혁의 레이블로 마시는 와인 <10> 파소피시아로(Passopisciaro)

이 레이블은 이탈리아에서 ‘살아있는 전설’이란 별명을 얻은 와인 업계의 이단아 안드레아 프랑케티(Mr. Andrea Franchetti)가 시칠리아에서 만든 파소피시아로 와인이다. 파소피시아로는 ‘passo(길)’와 ‘pesce(물고기)’를 결합한 말이다. 해발 1000m가 넘는 에트나 산에 위치한 마을 이름으로 ‘생선 장수들이 지나던 길’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웅크린 새는 모성애를 상징하는 펠리컨이다. 입에 진주를 물고 왕관 위에 앉아 있는 펠리컨은 프랑케티 가문의 오래된 문장이기도 하다.

시칠리아 문화를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안드레아는 시칠리아 에트나 화산 주변의 화산재 토양의 포도밭에 주목했다. 이 주변은 화산이 여러 차례 폭발하면서 분출된 다양한 성분의 화산재가 각기 다른 토양을 만들어 낸 곳이다. 그리고 그 위에 80~130년 수령의 토착 품종, 네렐로 마스칼레제가 자라는 황폐한 포도밭이 있었다.

2000년, 안드레아가 해발 1000m 고지에 위치한 이 포도밭을 재건하려 하자 모두 미친 짓이라며 만류했다. 실제 포도밭 주변으로 바람은 검은 화산재를 몰고 왔고 여름에도 밤에는 추웠다. 와인은 매우 거칠어 끊임없는 작업을 요했다. 또 에트나는 활화산이기 때문에 언제 용암이 포도밭을 덮칠지 모르는 상황이라 보험에도 들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악조건에도 안드레아의 관심은 ‘네렐로 마스칼레제’에 집중됐다. 이곳에서만 자라는 토착 품종으로 피노 누아의 먼 조상으로 알려진 품종이다. 안드레아는 이 품종의 독특함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양조 기술을 보완하고 수확 시기를 최대한 늦춰 과거의 에트나 와인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데 마침내 성공했다.

안드레아는 이 지역 역사의 흔적을 와인 레이블에 표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에트나 화산의 북쪽 경사면 고지대에 위치한 오래된 농가와 셀러를 처음 매입했을 때 발견한 고문서를 사용하기로 했다. 비록 이 지역이 지금은 황폐했지만 역사적으로는 BC 3세기께 이미 포도 재배의 기록이 있을 만큼 오래된 와인 생산지였다.

그는 고문서를 밀라노의 그래픽 디자이너 올기나 브뤼노에게 보여주었다. 브뤼노는 에르메스, 발렌티노와 같은 유명 패션업계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안드레아의 아이디어를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으로 레이블에 표현했다.

시칠리아의 활화산 지역에서는 아직도 포도나무 병인 필록세라 발병 이전의 포도나무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된 포도나무들이 남아 있다. 무모했던 안드레아의 성공 이후 많은 와이너리들이 이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안드레아 자신도 500~1000m 사이에 토양이 다른 새로운 포도밭을 조성해 지금은 모두 7구역의 포도밭을 갖고 있다.

파소피시아로 와인은 더운 지방에서 생산되는 와인 특유의 농밀한 맛보다는 산미가 유별나게 느껴진다. 또 오래된 수령 때문인지 부드러운 타닌과 이국적인 스파이시함 또한 일품이다. 아마도 화산 토양의 기운이 깊게 배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매일 지나가던 물고기 장수들의 서정적인 멋이 와인 속에 스며들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