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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 벌 겸 … 적적함 달랠 겸 … 아파트 방 세놓기 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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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호 10면

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한 아파트. 평범한 40평대 아파트지만, 방 4칸짜리 이 아파트엔 4가구가 모여 산다. 집주인 김모(44·여)씨는 5년 전 대기업에 다닐 때 대출을 받아 이 아파트를 마련했다. 이후 김씨는 퇴직했고, 지금은 자영업을 한다. 그사이 부동산 경기는 차갑게 식어 매달 100만원 남짓한 대출 이자가 큰 부담이었다. 어쩔 수 없이 생각해 낸 고육책이 셰어하우스(share house). 여러 가구가 방은 각자 쓰되 거실과 주방 등을 공유하는 주거형태다. 미혼인 김씨는 방 3칸을 모두 월세로 내놨다. 그는 “함께 살던 동생이 결혼해 떠난 뒤 방이 남았다”며 “전 재산인 집을 팔기도 싫고, 팔려고 해도 제값을 받을 수도 없어 대출 이자도 마련할 겸 방을 세놓았다”고 말했다. 김씨는 “여러 식구가 같이 살려니까 솔직히 불편하지만, 경제적 부담 때문에 감수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동산 장기침체가 불러온 新풍속도, 셰어하우스(share house)

 세입자 고모(40)씨가 이 집에 들어온 것도 경제적 사정 때문이다. 고씨는 사업을 하다 큰 돈을 날렸다. 그는 “빚을 갚고 재기해야 하는데 이만한 원룸을 구하려면 월세는 물론 보증금 부담이 커 이 아파트에 들어오게 됐다”고 말했다. 또 다른 세입자 이모(31·여)씨는 중국·호주 등 외국 생활을 오래한 케이스. 이씨는 “외국에는 셰어하우스가 매우 보편화돼 있다”며 “한국에는 이런 주거형태가 드물어 이 아파트를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 지금은 만족한다”며 웃었다.

일본·유럽과 달리 한국은 '생계형'
셰어하우스의 불문율은 철저한 프라이버시 보호다. 세입자들은 소음 방지에 각별히 신경 쓴다. 주인이라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세입자의 사생활에 끼어들지 않는다. 사전 약속 없이는 방문에 노크도 하지 않는다. ‘한 지붕 네 가족’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금융위기 여파로 시작된 부동산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한국 사회에도 셰어하우스가 차츰 늘고 있다. ‘내 집’에 대한 욕구가 크고, 프라이버시에 예민한 한국에서는 익숙지 않던 이런 형태의 집들이 늘어나는 데는 사정이 있다. 집주인 입장에서는 아파트 값은 계속 떨어지는데 팔려고 해도 거래가 안 된다. 전세·월세 시세가 끝없이 올라 집 없는 이들도 고달프다. 양쪽의 수요가 만나 ‘셰어하우스’라는 절충점이 나온 것이다.

 일본과 유럽에 흔한 본래 의미의 셰어하우스는 입주자들이 자발적으로 주택을 설계하고, 공동체 생활을 이어간다는 게 핵심이다. 이것과 비교하면 최근 국내에서 늘어나는 셰어하우스는 ‘생계형’이라는 점이 다르다. 건국대 부동산대학원 조주현 교수는 “정부의 정책적 해결을 기다릴 수 없는 하우스푸어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형태”라며 “널리 퍼지는 데는 한계가 있겠지만, 여건이 맞는 하우스푸어들에게는 해결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포털의 부동산 직거래 사이트에는 이런 ‘공유형’ 매물이 크게 늘고 있다. 대부분 보증금 없는 월세 계약이라 부동산소개소를 거치지 않는다. 그만큼 소개 수수료를 아낄 수 있는 것도 셰어하우스의 매력. 일반 아파트보다 월세로 내놓기 편하다는 이유로 가변 벽체식 아파트가 인기를 끌기도 한다. 2000년대 들어 많이 공급된 가변 벽체식 아파트는 방과 방 또는 거실과 방 사이에 가벽을 세워 공간을 나눌 수 있다. 서울 방배동에서 부동산 업소를 운영하는 박인호 공인중개사는 “주인과 세입자의 공간을 나눠 월세나 반전세 형태로 임대하기 수월해 이런 주택들이 인기”라고 말했다.

 셰어하우스가 증가하는 배경엔 경제적 이유만 있는 게 아니다. 부산시 사하구 하단동의 방 3칸, 화장실 2칸짜리 아파트에 사는 최순자(64) 할머니. 그는 6년째 방 2칸을 대학생들에게 세를 주고 있다. 자녀들은 출가한 지 오래고, 작은 사업을 하는 남편은 중국에서 지낸다. 최씨는 대학생에게 세를 줄 때 ‘얼마나 있을지’를 먼저 물어본다. 가급적 오래 정을 나누며 살고 싶어서다. 값은 전기료·관리비 따로 없이 한 달 28만원만 받아 원룸보다 훨씬 싸다. 하숙과 달리 밥을 해주겠다는 ‘계약’은 안 하지만, 빨래·청소뿐 아니라 불규칙한 대학생 세입자가 끼니를 거르지는 않는지 늘 살피고 챙긴다. 학생들과 사는 얘기를 주고받으며 어쩌다 술이라도 한잔 나누는 게 낙이다.

 최씨는 7년 전, 당시 대학생이던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 후 아들·딸 또래의 대학생들을 세입자가 아닌 자식처럼 돌보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래고 있다.

 셰어하우스가 늘어나는 이면에는 인구구조의 변화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가족의 해체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1인, 2인 가구가 크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신정동의 김모씨와 세입자들, 부산 최씨와 세입자들 모두가 1~2인 가구다. 통계청이 지난해 발표한 장기 인구 추계에 따르면 2000년 전체 가구의 15.6%였던 1인 가구는 2013년 25.9%에 이른다. 1인 가구는 2020년에는 29.6%, 2035년에는 34.3%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2인 가구까지 합칠 경우 그 비중은 2013년 현재 전체의 51.6%나 되고 2035년이면 70%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부동산 거품의 붕괴와 함께 1인 가구가 급증하는 시대상이 만나 셰어하우스 등 새로운 형태의 주거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한다. 도시설계 전문가인 최명철 단우어반랩 대표는 “1인 가구가 급증하는 현실에서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아파트로는 변화를 수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1~2인 가구에 맞게 개인 공간은 작으면서도, 이웃 간에 서로 정을 나누고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주택 공급이 확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거품 붕괴와 1인 가구 증가 영향 
계획단계부터 입주자들이 참여해 공동생활을 준비하는 본격적인 셰어하우스도 있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성미산마을의 소행주(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2011년 9가구가 사는 소행주 1호가 입주한 뒤, 2호를 거쳐 올해 6월에는 3호가 완공된다. 소행주 1호 주민인 김우(43·여)씨는 “서재와 아이 놀이방, 영화 관람실 등 공용 시설을 쓰고 있다”며 “개별 주택에 마련하기 어려운 시설을 손쉽게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이웃들과 정을 나누며 살 수 있어 무척 만족한다”고 말했다. 소행주 박흥섭 공동대표는 “경기도 용인, 광주, 수원 등에서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며 “조만간 이들 지역 중 한 곳에서 4호 작업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입주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지만, 공용 공간을 늘린 형식의 공동주택은 민간에서도 활발히 공급되기 시작했다. 수목건축은 서울 서대문구에 공용 공간을 갖춘 임대주택 ‘수목 마이바움 연희’를 공급했다. 주방과 거실,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공용 공간을 세련되게 꾸몄다. 공용 공간을 저렴한 가격에 음식을 사먹을 수 있는 북카페 형식으로 만들어 1인 가구가 대부분인 세입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주변보다 임대료가 비싼 편인데도 공실이 거의 없다. 서용식 대표는 “일본이나 유럽에 비해 한국은 사생활 보호에 대한 요구가 더 많은 편”이라며 “욕실·세탁실 등은 개별 공간에 넣고, 수요가 많은 부분만 공용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건국대 조주현 교수는 “새로운 형태의 주택이 더 많이 나오고 자리 잡으려면 그에 따른 건축법상의 인센티브 등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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