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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게임 붐 한국이 이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광대역 인터넷 서비스에 힘입어 게임 인구 급속 확산
추락한 신경제를 되살릴 수 있는 ‘소비엔진’으로 기대

넓은 홀에 컴퓨터 단말기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미국 휴스턴에 있는 항공우주국(NASA) 우주비행관제소나 워싱턴市 인근의 어느 산에 숨겨져 있는 전쟁상황실 같기도 하다. 모니터 불빛에 비친 사람들의 얼굴은 붉게 상기돼 있고 화면상에선 사활을 건 격전이 벌어지고 있다. 단말기들과 위에 걸린 초대형 비디오 전광판은 전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한 거대한 제국을 보여준다. 우주공간의 전략 요충지에도 경비병력이 배치돼 있다.

테러리스트들과
테러 진압요원들이 대치하고, 총잡이들이 미로와 같은 골목을 누비면서 악당들을 날려버린다. 총을 맞은 악당들은 피를 튀기며 산산조각이 난다. 그리고 사이버 축구선수들의 모습도 눈에 많이 띈다.
최근 서울의 한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제1회 월드사이버게임즈(WCG) 광경이다. 올림픽 오륜기를 연상케 하는 3륜기 아래 37개국에서 온 4백명의 선수들이 ‘우정과 화합을 위한 페어플레이’를 약속한 뒤 키보드와 마우스를 손에 쥐고 (가상공간에서) 상대방을 날려버리기 시작했다.

이를 끓어오르는 혈기를 달리 분출할 길이 없는 청소년들이나 하는 일종의 현실도피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리그·후원사, 그리고 WCG처럼 상당한 상금이 걸려 있는 스포츠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 게임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도 있다. 온라인 경제에 다시 강한 드라이브를 걸 수 있는 소비 엔진이라는 것이다.

업계 전문가들에 따르면 앞으로 인터넷을 이용한 쌍방향 게임이 커다란 인기를 모을 것이다. 그에 따라 새 하드웨어에 대한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소비자들은 더 성능이 좋은 PC를 사용하고 싶어하고, 마이크로소프트(MS)社의 X박스와 닌텐도社의 게임큐브 같은 게임기를 앞다투어 사는가 하면 3세대 이동전화로 게임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게임 소프트웨어 사업은 하드웨어 사업보다 더 번창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온라인 게임은 新경제가 낳은 커다란 골칫거리인 대역폭 공급과잉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지난 5년간 지하와 해저에 광섬유케이블을 설치하는 데 수십억달러가 소요됐다. ‘정보 고속도로’가 화젯거리이던 시절에는 광섬유케이블만 깔면 초고속 정보사회가 실현될 것 같았다. 그러나 광섬유케이블이 실어다준 것은 디지털 데이터보다는 주로 빚더미였다.

엄청난 데이터를 배출할 것으로 기대됐던 닷컴·3세대 이동전화·주문형비디오(VOD)같은 사업들이 빛을 보지 못했거나 아직도 태동단계에 있다. 그래서 오늘날 ‘8차선 정보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은 두어대의 장난감 자동차들 뿐이다. 그리고 독점 통신업체들이 타업체에 통신회선을 임대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정보 고속도로에 진입로가 거의 없다. 디지털가입자회선(ADSL)과 케이블 모뎀 같은 초고속 서비스가 널리 알려졌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인터넷 사용자들은 굼벵이처럼 느린 모뎀을 이용한다.

요즘은 기업체들이 섣불리 투자에 나서지 않는다. 따라서 기업과 정부는 많은 사람들이 초고속 회선을 갖춰야만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정말로 원한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움직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게임이다. WCG를 주최한 ICM의 오유섭 사장은 “컴퓨터 게임은 그래픽·애니메이션 등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초고속 인터넷이 필수”라고 말했다.

말 그대로 수백만km에 이르는 케이블이 남아돌고 광대역 서비스 가격이 폭락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자의 수요, MS 같은 업계의 강자, 규제가 완화된 텔레콤 분야의 신생 광대역 사업체나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독점업체들의 적극적인 진출의사만 있으면 시장이 활성화될 것이다. 실제로 그 모든 것들이 테트리스 게임의 많은 벽돌처럼 척척 맞아떨어지고 있다.

미국만 해도 전체 비디오 게임용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시장은 올해 약 1백3억달러 규모로 할리우드와 맞먹는다. 현재 대부분의 미국인 사용자들은 TV나 컴퓨터, 아니면 휴대용 게임보이로 게임을 즐길 뿐 인터넷으로는 게임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석가들에 따르면 곧 변화가 찾아올 전망이다. 최근 고속 인터넷 접속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진 신형 또는 변형 게임기들이 시판되기 시작했다.

X박스는 하드드라이브와 광대역 접속장치가 내장돼 있다. 게임큐브와 소니社의 플레이스테이션2도 몇달 내에 광대역 어댑터를 장착할 예정이다. 시장조사회사인 가트너G2에 따르면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그같은 게임기용 게임들을 더 많이 개발함에 따라 온라인 게임 시장이 2005년에는 23억달러 규모로 크게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첨단기술의 세계에서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텔레콤 독점업체들이 광섬유 네트워크를 경쟁업체들에 저가에 임대하도록 정부가 유도할 것인가. 미국 애틀랜타의 거실에 앉아 있는 아이들이 정말로 인도 방갈로르에 있는 아이들과 게임을 하고 싶어할까. 온라인 게임 열기가 젊은층을 넘어서 호기심 많은 성인층으로 확산될까.

MS社는 그런 날이 올 것으로 확신한다. MS社는 ‘X박스’ 개발에 수억달러를 투자한 후 지금은 게임기 자체보다 온라인 게임 부문에 더 많은 인력을 투입했다. X박스 개발을 총괄하는 J. 앨러드는 “발전 가능성은 무한하다. 내가 해본 게임 중 온라인의 혜택을 보지 못할 것은 없다”고 말했다. 세가社가 2년 전 출시한 최초의 쌍방향 온라인 게임기 ‘드림캐스트’는 얼마 전 단종됐다.

그러나 앨러드의 생각은 흔들림이 없다. 두 게임기는 차이가 있다. 드림캐스트는 전화모뎀을 사용했지만 X박스는 광대역용으로 제작됐다. 앨러드는 “온라인은 새로운 혁명이다. 이것은 2년 정도 후에는 우리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프랑스의 IT기업 인포그램스社의 공동창업자 브뤼노 보넬 같은 사람은 이같은 추세를 ‘호모 사피엔스’가 ‘호모 루덴스’(유희의 인간)로 진화하는 것에 비유한다. 보넬은 “동물도 놀기는 하지만 게임을 하지는 않는다. 동물은 환상의 세계를 만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소년·소녀들도 물론 그저 재미를 추구한다. 그러나 게임 그래픽은 사용자의 눈을 사로잡고, 액션은 마음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게임에서 손을 떼지 못한다. 각종 조사자료에 따르면 ‘골수 게이머’의 평균 연령이 상승하고 있다. 게임을 하던 어린이들은 성인이 되어 직장을 갖고 가정을 이룬 후에도 계속 게임을 한다.

그중 일부는 영국의 수조이 로이(26)처럼 프로로 전향한다. 로이는 JP 모건社 투자은행가라는 유망한 직업을 버리고 프로 게이머가 됐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게임에 열중했다. 게임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어느 해인가 그는 게임 전용 마우스 제조업체인 레이저社를 비롯한 여러 기업에서 20만달러의 후원금을 받았다. 3차원 미로 속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퀘이크’ 게임으로 그만한 돈을 번 것이다.

월드사이버게임즈 같은 부류의 행사에서 알 수 있듯 게이머들의 온라인 게임에 대한 열성은 대단하다. 유럽·미국의 게이머들은 강당을 빌린 다음 자기 컴퓨터를 직접 들고 와서 한자리에 모인다. 이렇게 모인 수백명의 게이머들은 컴퓨터를 LAN으로 연결한다. ‘퀘이크’·‘언리얼 토너먼트’ 같은 총격게임을 좋아하는 게이머가 있는가 하면, ‘스타크래프트’ 같은 전략 게임을 좋아하는 게이머도 있다.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를 좋아하는 게이머들도 많다. 축구팬들은 ‘FIFA 2001’로 경기를 벌인다.

물론 대다수 성인들은 어린 시절 마우스를 쥐어 본 적이 없고 가방에 게임보이를 넣고 다니지도 않았다. 이들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게임 세계의 참맛을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게임산업에 수억달러를 투자한 어느 프랑스 기업의 경영자는 실제로 게임을 해본 적이 없다. 안젤리나 졸리의 팬들 중 영화 ‘툼레이더’의 주인공 라라 크로프트가 원래 3차원 어드벤처 게임의 캐릭터라는 사실을 몰랐던 사람이 많을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세계의 광대역 인터넷 이용에 관해 조사했지만 온라인 게임의 영향은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OECD 텔레콤 부문의 디미트리 입실란티는 “이것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기나 카드놀이 세대 사이에서도 온라인 게임이 서서히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다. IDC社 분석가 셸리 올하바는 “무료 초보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수천만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MSN의 게임사이트 ‘존’(Zone) 같은 곳은 한달에 1천만명에 이르는 방문객을 자랑한다. 이것은 회원으로 가입할 필요가 없고, 따로 내려받기를 할 필요도 없어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있다.

‘존’ 사이트를 관리하는 에디 랜치고다는 “성장의 열쇠는 손쉽게 이용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존’에 ‘퀴즈’와 ‘알케미’ 게임을 개설한 이후 주간 이용자가 10배로 늘었다. 많은 사용자가 근무시간에 게임을 하며, 이용자의 52%가 여성이다. 랜치고다는 “게임에 처음 입문한 사람들로 하여금 좀더 복잡한 게임을 배우게 해야 한다. 그래야 서서히 광대역 인터넷에 열광하게 되고, 그것의 필요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이런 발전이 거의 순식간에 일어났다. 한국은 1990년대 중반 초고속(광대역) 인터넷 시장을 개방해 치열한 경쟁을 촉발했다. 반면 상당수 유럽 국가에서는 국영기업이 민영화된 후에도 이 사업을 독점했다. 시장이 개방되자 여러 한국 기업들이 뛰어들어 저렴한 인터넷 전화 서비스·쌍방향 게임 등 신상품을 앞다투어 내놓았다. 오늘날 한국인 1백명 중 13명이 전화모뎀보다 2∼10배 더 빠른 광대역 인터넷 서비스에 가입했다. OECD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이 정도로 광대역이 보급된 나라는 없다. 미국은 1백명중 2.25명, 프랑스는 0.31명, 영국은 0.09명에 지나지 않는다.

광대역 네트워크가 구축되고 이용료가 저렴해지면 사람들은 게임을 즐길 것이다. 포레스터 리서치社의 분석가 레베카 울프는 “온라인 게임이 보급되면 광대역 가입자도 늘어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광대역이 널리 보급되면 게이머도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영국에서 게임 대회를 조직하고 있는 수조이 로이는 서울에서 본 장관에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는 흥분된 분위기가 있었고, 돈이 있었으며, 게이머의 열성팬까지 있었다. 그는 런던으로 돌아간 후 부러운 듯 “세계에서 한국 같은 곳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다른 지역에서도 곧 게임이 시작될 것이다.
With Marc Scanlan in Paris and B.J. Lee in Seoul

Christopher Dickey 파리 지국장
자료제공 : 뉴스위크 한국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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