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도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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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뉴요크」의 「아메리카나·호텔」은 개점후 열달동안에 3만8천개의 수저, 1만8천장의 「타월」, 3백55개의 은제「코피」주전자를 도둑맞았다. 숙수들이나 급사들이 훔쳐낸 것이 아니라, 점잖은 신사숙녀고객들의 솜씨. 풍요를 뛰어넘어 이제 「위대한 사회」를 지향하는 미국의 일류「호텔」고객들이 설마 그럴리야있겠느냐고 곧이듣지 않겠지만, 사실이 그랬다.
없어진 것이 수저나 은주전자에 그쳤으면 좋았을 텐데, 같은 열달동안에 객실에 비치해둔 성경이 무려 1백권이나 사라졌으니 기막힐 노릇. 그러나, 손님들이 성경을 읽기 위해서, 혹은 신앙심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성경책을 슬쩍해 갔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큼직하고 예쁘고 탐스럽게 장정해놓은 성경책은 수저나 은주전자와 다름없는 「물건」이었고, 마음의 양식이 아니라, 한 상품으로서 손님들의 촉수를 동하게 한 것이다. 독서주간을 맞으면서 서울의 한 공공도서관안에서 벌어진 도둑사태가 보도되었다. 이 경우에도 서적은 향학심이나 독서열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단순한 도벽의 좋은 「샘플」이다.
우리 나라와 같이 서가와 열람실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고 접가식이라고해서 열람자들이 마음대로 서가에 가서 읽고싶은 책을 맘대로 뽑아 볼 수 있는, 발달된 도서관체제아래서는 더욱 그렇다. 서점주인들이 수상한 서적수집가들로해서 입는 피해는 동서의 구별이 없고, 「빌려준 책은 잃은 책」이라는 통념 또한 범세계적이다. 인쇄술이 생겨나기전, 필사생들이 한자한자 베껴써서 책을 만들던 시절의 관념이 아직도 살아 남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 도둑은 결국 좀도둑에 그치고, 도서관 하나를 몽땅 털어 가는 류의 큰 도둑은 일찌기 없었다. 그리고 좀도둑을 맞을 것을 각오하고도 되도록 많은 시민들에게 되도록 많은 책을 공개해야하는 것이 도서관의 임무. 돌리다가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끊임없이 돌려읽어야 하는 것이 책이다. 책을 상품이 아니라 마음의 양식으로 여기는 인구가 늘면 보안조치의 필요가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도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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