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로지] 눈빛이 살아있는 배우 조재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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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연(緣) 부터 슬쩍 풀어헤치자면 나는 이미 15년쯤 전에 그를 만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영화를 공부하는 대학 3학년생이었고 나는 조연출 생활을 갓 청산하고 마냥 들떠 있던 새내기 PD였다.

망막에 잡힌 첫인상은 약간의 우수가 스민 내성적 미남이었다. 그를 소개한 사람은 MBC 카메라맨이었던 그의 형(조수현) 이었다. 입으로는 동생을 집안의 골칫덩이라고 말했지만 눈빛과 표정만큼은 '좀 잘됐으면 좋겠다'는 형다운 자애로 충만했다.


세월은 늘 그렇지만 좌충우돌이다. 불행히도 수현은 드라마를 촬영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그의 '문제아' 동생은 이제 TV와 영화를 넘나드는 '스타'가 되어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기억납니다. 한 마디로 뭘 몰랐던 시절이었죠. "

지금은 뭘 아느냐고 되묻기엔 그의 그림자가 꽤나 길어 보였다. 그는 연역적이라기보다는 귀납적인 배우다. 사춘기 시절 경제적으론 유복했지만 심리적으론 공황이었다. 원래 그림을 그렸는데 어느 날 움직이는 그림 속에 풍덩 뛰어들고 싶더란다. 세 번이나 가출을 '감행'했다니 그 젊은 날의 소란스러움이 짐작될 것이다. 하기야 풍상을 겪은 국화나 송죽이 더 소담스럽기는 매 한가지다.

그에게 '잘하는' 연기란 도대체 어떤 연기냐고 물으니 대답은 의외로 담백하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연기가 좋은 연기란다.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그는 얼마나 만족하고 있을까. "아직도 배우가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죠." 연기파 배우라는 딱지가 무색할 정도로 겸손하다.

지금 '피아노'를 연출하는 오종록 PD로부터 눈에 힘 좀 빼라는 말도 많이 들었단다.(그와는 '줄리엣의 남자''해피 투게더' 등을 함께 하며 서로의 코드를 해독해 가는 중이다) 지금은 어렴풋이 눈에 힘 줄 때 주고 뺄 때 뺄 줄 아는 정도라고 웃으며 답한다.

인터뷰 도중 한 무리의 어린이들이 사인을 받기 위해 몰려든다. 누군지 아느냐고 물으니 또렷이 조 재 현 세 글자를 힘주어 대답한다. "스타 됐다"고 추켜 주니 무척 쑥스러워 한다.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 배우가 됐는데 요즘은 오히려 부자유함을 실감하죠. "

스타는 대중에게 항상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점차 배워 가는 듯하다. 90년도에 연극 '에쿠스'의 알렌 역으로 주목받았지만 화면에서의 그는 늘 아웃사이더였다. 94년에 2부작 '신화'(정운현 연출) 에 출연했는데 그걸 본 김기덕 감독이 연락을 해왔다. 그의 눈빛에서 뭔가 섬뜩한 걸 발견이라도 한 것일까.

내리 다섯 편의 영화를 그와 함께 했다. 선뜻 탐내기 어려운 역이었다. 기둥서방.개장수.인신매매 중개범 등 예사롭지 않은 연기로 오히려 매니어를 확보했다.

"죽을 때까지 배우 할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여기까지다 라는 판단이 서면 언제라도 미련 없이 끝내야죠. " 내게는 그 말이 죽을 때까지 배우 하겠다는 말보다 더 강하게 들렸다.

헤어질 때 악수하면서 흘끗 보니 누군가를 많이 닮은 듯하다. 알 파치노인가, 로버트 드 니로인가. 다음 번 인터뷰는 세계적인 배우와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그가 남기고 간 손의 온기에서 감지되었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chjoo@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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