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 테러에 적응해가는 미국인

중앙일보

입력

충격의 2001년을 넘기면서 미국인들은 확실히 테러에 많이 적응해 가는 것 같다. 암이나 교통사고처럼 테러는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됐고 이를 막기 위해 투자해야 한다는 생각을 미국인들은 굳히고 있는 것이다.

지난 22일 발생한 '신발폭탄' 비행기 테러 미수 사건은 미국인의 테러 적응도를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시험이었다. 테러 자체가 불발이었고 범인이 국제테러 단체 소속이라는 얘기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지만 테러의 성격으로 보면 이는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테러리스트가 몸에 폭탄을 지니고 비행기에 타는 것을 막는 장치는 여전히 허술하다. 신발 말고도 폭탄을 몸에 숨길 수 있는 방법이 여럿 있다는 것이다. 공항에 설치된 금속탐지기로는 폭약을 탐지해낼 수 없다.

이를 잡아내려면 사람이 통과할 때 화약가루를 탐지해내는 검색대를 설치해야 하는데 경비가 많이 들고, 검색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등 문제가 많다. 신발폭탄 미수범이 통과한 파리 샤를 드골 공항의 경우 에어 프랑스와 이스라엘 항공 엘알이 중동행 비행기에 한해 이 검색방법을 적용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언제 어느 비행기에서 무슨 폭탄이 터질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도 미국인들은 별로 흔들리지 않고 있다. 항공권 예약 취소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도 없고, 사건 때문에 주가가 내렸다는 소식도 없다.

이 사건이 알 카에다 같은 테러단체의 보복작전으로 드러나거나 미수가 아닌 진짜 테러가 터지면 물론 반응이 달라지겠지만 아무튼 현재까지는 미국인들이 심리적으로 동요하는 기색은 없다고 뉴욕 타임스는 전하고 있다.

26일 ABC 방송 여론조사에 따르면 항공 여행객의 95%가 보안검색을 위해서라면 탑승이 지연돼도 상관없다는 반응이다. 운전할 때 위험차량을 주시하는 것처럼 미국인들은 공항에서 위험인물을 살핀다. 주변 승객의 옷차림을 보고 신발을 쳐다본다.

밑창이 두꺼운 '에어 조단' 운동화는 한번 더 쳐다본다. 뭔가 불안한 행동을 보이는 사람은 찍어둔다. 비행기에 타서는 테러리스트에게 어떤 물건을 어떻게 집어 던질 것인가 마음속으로 정해둔다.

요즘 많은 기장들이 "일이 터지면 신발폭탄 테러범을 제압했던 승객들처럼 행동해달라"고 기내방송을 한다고 한다. 테러리스트가 공항 검색대를 무사히 빠져나왔다고 안심할 일은 아니다. 비행기 안에 또 다른 수십, 수백개의 인간검색대가 있는 셈이다.

김진 특파원 jin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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