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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제3 김종훈들’의 울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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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박승희
워싱턴 총국장

워싱턴포스트는 내년 1월에 임기가 끝나는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의 후임으로 스탠리 피셔 전 국제통화기금(IMF) 부총재가 유력하다고 보도했다. 피셔는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한국에 대한 구제금융을 다뤄 우리에게도 익숙한 얼굴이다. 그의 이력은 특이하다. 원래는 아프리카 잠비아 태생이다. 17살 때 미국으로 이민 와 시민권자가 됐다. MIT 교수를 지냈고, 세계은행 부총재를 역임했다. 그런 그를 피도 섞이지 않은 이스라엘은 2005년에 삼고초려해 중앙은행 총재직을 맡겼다. 이스라엘 국적을 딴 건 물론이다. 이스라엘은 피셔와 함께 2008년 금융위기를 극복했다. 그를 다시 미국이 데려다 중앙은행 총재를 맡기려 한다는 얘기다. 피셔의 국적을 놓고 시비를 벌였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요즘 교민들을 만나면 온통 화제가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 얘기다. 그의 성공담에서 시작된 대화는 대부분 울분으로 끝난다. 성격 급한 사람은 “장관이고 뭐고 나라면 당장 때려친다. 그만한 재산을 가지고 편하게 살지, 뭣 하러 말년에 고국에 가서 애먼 욕을 먹느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 나라의 장관이 되겠다는 사람을 검증하는 건 당연하다. 그 잣대는 냉정하고,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이중국적 논란 속에서 빛난 건 야권 출신인 박원순 서울시장의 발언이다. 그는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못 담글 순 없다. 김종훈씨만이 아니라 외국의 훌륭한 인재가 있다면 한국에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장 그릇이 다르긴 다르다.

 미 중앙정보국(CIA) 논란도 ‘팩트(fact, 사실)’보다는 ‘의혹’이 먼저 내달리고 있다. 제임스 울시·조지 태닛 등 CIA 국장들과 김 후보의 관계는 꽁꽁 숨어 있던 게 아니다. 구글과 CIA 홈페이지에서 김 후보 이름만 치면 고스란히 뜬다. 1991년 김 후보가 딴 박사 학위는 위성시스템의 신뢰도와 내구성에 관한 연구다. 통신분야 전문가인 그를 CIA가 더 필요로 했다고 한다. 미국의 국가 안보와 관련된 일도 다뤘을 게다. 의혹을 제기하는 쪽은 ‘CIA 커넥션’이라는 용어도 쓴다. 사실상 스파이 취급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김 후보가 한국 정부를 위해 일할 경우 오히려 몸이 다는 건 CIA 쪽이다.

 김종훈 논란의 또 다른 유감은 박근혜 당선인이다. 데려온 게 아니라 모셔왔다면 처음 인선 발표 때 직접 이런저런 설명을 했어야 한다. 인수위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과제 140개를 발표했다. 정보통신 최강국 건설 등 미래창조과학부와 관련된 게 많다. 하지만 그 수장이 될 사람은 지금 벌판에서 홀로 물어뜯기고 있다. 그런데도 당선인은 침묵만 하고 있다. 이 모든 걸 지켜보는 제2, 제3의 김종훈들은 매정한 조국에 등을 돌리고 있다.

박 승 희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