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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퇴임 교수의 마지막 강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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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당신 음악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당신네 나라 음악은 어떤 것입니까?” 젊은 시절 내내 기타를 치고 록과 소울을 연주해온 우리나라 뮤지션에게 이 질문은 당혹스러운 것이었을 게다. 특히나 음악을 배우러 미국에 유학을 갔다가 외국 뮤지션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으면 자존심도 상하고 마음이 많이 아팠을 것이다. 영화 ‘서편제’의 음악을 작곡했던 뮤지션 김수철은 오래전 인터뷰에서 그가 왜 우리 음악에 천착하게 됐는지를 이 일화로 설명했다. 우리 가락을 바탕으로 외국인들도 즐길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자 평생 노력했던 그의 삶이 조금이나마 이해된다.

 우리는 타자를 통해 자아를 들여다보는 기회를 얻는다. 다른 나라를 만나면서 우리나라를 생각하게 되고, 그들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의 것을 살펴본다. K팝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한류가 아시아 유행을 선도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것을 되돌아볼 적절한 시기다.

 그런데 우리의 것을 찾아보려 하니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다. 기록의 소중함, 아카이빙의 중요성을 여태 공유하지 못한 탓에, 옛 건물들은 점차 훼손돼가고 있고 자료는 제대로 챙겨지지 못해 사라져간다. 강제 징용됐던 위안부 할머니는 하나둘 세상을 떠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남아 있지 않고, 인간문화재의 삶과 문화적 가치는 제대로 전수되지 못한 채 세상에서 소멸된다. ‘인간의 모든 지적 유산을 기록해 세상에 전한다’는 영국 공영방송 BBC의 모토가 그저 부러울 뿐이다.

 ‘기록과 보존’의 가치는 끊임없이 다음 세대에 전수되고 향유될 때 제 의미를 갖는다. 도서관 기록실의 먼지 쌓인 서류 더미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 문화 속에 스며들어 존재할 때 우리 문화는 비로소 생기를 얻는다. 해외 뮤지컬을 예술의전당에서 관람하듯, 안숙선 선생의 완창을 관람할 수 있을 때, 그리고 그것이 다시 이자람에 의해 전수되고 새롭게 해석될 때, 우리 문화는 그제야 살아 숨쉰다. 그것이 영국의 유전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말하는 ‘밈(meme·유전자가 아니라 모방 등에 의해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비유전적 문화요소)’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음악교과서에 우리 음악의 비중이 턱없이 부족하고, 옛 선인들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점점 사라지는 건 안타까운 현실이다.

 ‘기록과 보존’은 문화와 예술의 영역에서만 절실한 것이 아니다. 어떤 영역에서든, ‘역사적 가치를 가진 것들’은 모두 기록되고 보존되고 전수되어야 한다. 그 관점에서 우리나라 대학들에 한 가지 제언을 드리고 싶다. 대학에서 평생 학문에 정진해온, 이제 곧 정년퇴임을 앞둔 교수님들의 마지막 수업을 녹화해서 보관하면 어떨까? 수십 년간 한 분야에서 학문세계를 깊고 넓게 탐색했던 그가 마지막 강의를 통해 모든 지식과 통찰을 고스란히 쏟게 하고, 그것을 기록·보존해 다음 세대도 접할 수 있게 해주면 어떨까 말이다.

 정년퇴임을 하는 교수는 그 대학교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다. 우리는 이 자산을 얻기 위해 수십 년간 연구비와 시간, 노력을 투자해 왔으며, 지원과 격려 또한 아끼지 않았다. 그들이 이제 대학 강단을 떠나려 하는 오늘, 그들의 퇴임이 한 학문적 세계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도록 그들의 통찰을 기록하고 보존해야 한다.

 MIT나 스탠퍼드대에서 하는 ‘오픈 코스웨어(open courseware·대학들이 사회공헌 등의 목적으로 온라인을 통해 강의를 공유하는 것)’를 흉내 낼 것이 아니라, 정년을 앞둔 교수님의 마지막 강의를 기록하는 데 그 장비를 활용해볼 일이다.

 인간문화재의 목소리는 기록되어야 마땅하고, 그들의 손재주는 전수되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노년의 소설가에게 ‘왜 평생 그토록 열심히 글을 써왔는지’ 물어야 하며 그들의 내밀한 목소리를 소중하게 담아야 한다. 인문학자들의 학문적 삶을 기록해야 하며, 자연과학자들의 실험실을 보존해야 한다. 다음 세대에 귀한 참고가 될 수 있도록 정치인들의 생생한 경험을 기록해야 하며, 한 기업을 성장시킨 리더의 목소리는 보존되어야 한다.

 KAIST 출판부는 올해부터 정년퇴임하는 교수의 마지막 학기 강의를 기록할 준비를 하고 있다. 단언컨대, 이제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그들의 마지막 수업은 명강의가 될 것이다. 전혀 화려하지 않고 심지어 지루할지라도, 그들의 목소리는 학교 도서관 한쪽에서 학문의 전당에 큰 울림이 되어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기록하고 남겨야 하는가? 내 주위에서 그 해답을 찾아봐주시길, 그리고 그것을 실천에 옮겨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시간이 많이 가기 전에, 우리 목숨이 다하기 전에.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