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논단] 하나의 유럽… 두얼굴의 유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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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뒤면 유럽 12개국에선 '유로'라는 새로운 돈이 본격적으로 통용된다. 그러나 유로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 단일통화 시스템이 서로 다른 경제 구조를 가진 나라에 얼마나 잘 들어맞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유럽 국가들이 똑같은 동전과 지폐를 사용하게 됐다는 건 1993년 관세가 없는 단일시장을 만든 이후 '하나의 유럽'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정점에 이르렀다는 걸 뜻한다.

유럽인들은 99년 1월 유로가 첫 등장했을 때 미국 달러의 경쟁상대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유로화의 가치는 최근 달러보다 10% 가량 낮은 수준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유럽중앙은행(ECB)은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제한적인 정책 결정권만 갖고 있다.

소극적인 금리인하 정책 등으로 ECB는 인플레이션을 누르는 데는 성공했지만 높은 실업률과 더딘 성장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유럽인들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를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FRB는 미국 경제가 호황이나 불황을 맞았을 때 필요한 금융.재정정책 등을 발빠르게 취하는 수완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유로 사용국의 경제 상황은 천차만별이다. 독일.프랑스처럼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가 있는가 하면 포르투갈.스페인처럼 농업이 주를 이룬 곳도 있다. 아일랜드.스페인은 독일이 저성장의 수렁에 빠져 있을 때 역동적인 성장을 경험했다.아일랜드는 ECB의 정책 결정에 불만을 품고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일부 유럽인들은 견실한 경제를 가진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가 동등한 가치를 지닌 돈을 사용하는 게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폭동 사태가 일어난 아르헨티나도 정부가 페소를 달러에 고정시켰기 때문에 경제가 망가진 것이다. 이웃나라인 브라질의 레알화가 평가절하되는데도 아르헨티나 페소 가치는 그대로여서 상대적으로 수출 경쟁력이 떨어진 것이다.

단일통화 제도는 사실 이전에도 존재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화폐단위의 가치를 일정량의 금의 가치와 연계하는 금본위제가 있었다.

이 제도를 채택한 나라의 화폐는 고정된 교환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일종의 통화 동맹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는 1865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스위스가 동전의 가치를 프랑스 프랑과 같게 하는 협정에 서명했다고 최근 보도했다. 1868년엔 그리스가 이 협정에 동참했고, 서명을 안한 스페인.핀란드도 이런 흐름을 따랐다. 나중엔 협정 참가국이 17개국으로 늘었다.

유로는 화합의 전도사인 동시에 분열의 촉매제가 될 수 있다. 12개국은 전보다 훨씬 가까워졌지만 영국.스웨덴.덴마크 등 아직 유로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들과는 점점 거리가 생기고 있다.

유럽연합(EU) 정상들은 지난주 벨기에에서 회담을 하고 2004년까지 유로 회원국을 최대 10개국이나 더 늘리는 방안을 논의했지만 가까운 시일 안에 회원국이 될 나라는 거의 없다. 지금의 상황을 건물짓는 것에 비유하자면 본관과 별관을 따로 두는 꼴이다. '하나의 유럽'을 처음 구상했던 장 모네가 마음에 담았던 건 이런 모습이 아닐 것이다.

윌리엄 파프<칼럼니스트.iht 12월 21일자 기고>
정리=김준술 기자 jso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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