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즘은 허구다 '근대의 서사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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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모레티의 『근대의 서사시』 번역.출간은 근대문학 인식에 대혁신을 가져올 사건이다.

이탈리아 베로나대, 미국 컬럼비아대 등을 거쳐 현재 스탠퍼드대 영문과 교수로 있는 저자는 근대 유럽문학 연구에서 가장 자극적인 성과를 내놓고 있는 문학사가이자 비교문학자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비평의 대표적인 학자 중 한 사람으로 분류되곤 하지만 그의 작업은 특정 유파에 귀속시키기 어려운 절충적 성격을 갖고 있다.

모레티 비평의 특징은 문학작품의 형식 분석과 문학 생산의 역사적.유물론적 인식을 결합한 데 있다. 그것은 문학의 수사학과 사회학의 마술적 종합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모레티는 유럽문학 전체를 시야에 넣고 그 정전들을 다루면서 일종의 낯설게 하기를 스릴 있게 실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필적할 상대가 거의 없다.

그와 비교하면 프레드릭 제임슨은 지루하고 스티븐 그린블래트는 모호하다.

그러나 그의 비평 마술이 최고의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텍스트 분석보다는 장르 연구에서다. 고전적인 저서 『세상살이』에서 그는 유럽 교양소설을 '상징적 형식'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하여 그 장르가 담고 있는 모더니티의 모순에 대한 복잡한 해법을 흥미롭게 밝혀낸 바 있다.

이 책 역시 문학 장르의 수사학과 사회학, 형식주의적 분석과 역사철학적 사변을 통합한 모레티 장르론의 한 절정이다.

모레티가 근대 서사시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서사시적 총체성의 세계를 추구하는 백과사전적이고 이질혼성적인 근대 서사물 유형이다.

그것은 『파우스트』에서 『율리시즈』와 『황무지』를 거쳐 『백년의 고독』에 이른다. 기존 문학 분류를 넘어선 근대문화의 '성스러운 텍스트'들을 가리킨다.

형식상으로 보면 브리콜라쥬,즉 재래 기법의 창조적 재활용을 주요 원리로 하는 근대 서사시는 소설과 종류가 다르다.

그것은 역사상으로 서로 다른 상징적, 사회적 형식들을 가동시키며 지리상으로 민족국가를 넘어선 훨씬 광대한 실체, 즉 세계 체제를 준거로 삼는다.

근대 서사시의 '세계 텍스트'는 말하자면 서양의 '세계 권력' 성립을 배경으로 하는 수사학적 실험의 산물이다.

세계 텍스트 속에서 서양 권력은 자신이 만든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 적응하고 그 모순과 씨름하며 새로운 지각과 상징의 지평을 구성한다.

모레티의 근대 서사시론은 문학사의 상식을 무너뜨리는 참신하고 심오한 통찰로 가득하다. 특히 모더니즘에 대한 통념을 근본에서부터 뒤흔든다.

그는 모더니즘을 고유의 미학을 지닌 어떤 통일된 실재로 간주하는 학설을 완전히 뒤엎고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서 가능한 총체성에 대한 상상의 한 표현으로 이해하도록 요구한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 같은 공식은 당연히 의심스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국내에서는 마침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관계를 재고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국의 비평가 한 세대가 루카치를 가지고 자신들의 의식을 단련했다면 앞으로의 한 세대는 모레티를 갖고 그렇게 할 것이다.

황종연(문학평론가,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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