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 열연 대니얼 데이 루이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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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지난 10일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영화 ‘링컨’에서 그는 위엄 있는 ‘미스터 프레지던트’로 거듭났다. [게티이미지]

두 번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리고 세 번째 남우주연상을 눈앞에 두고 있다.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의 일이다. 말런 브랜도, 톰 행크스, 더스틴 호프먼, 잭 니컬슨, 숀 펜. 이 쟁쟁한 배우들도 모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은 2회 수상에 그쳤다. 이변이 없다면 배우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곧 역대 최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가 된다. 어쩌면 그 상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남자 배우라는 인증일지도 모른다.

 라스베이거스 도박사들은 이미 그의 수상 가능성을 90% 이상으로 점치고 있다. 아카데미의 전초전이라 불리는 골든글로브 수상은 물론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 미국 배우조합상, 영국 아카데미상 등 유력 시상식의 남우주연상은 이미 모두 휩쓴 상태다.

 그의 연기력이야 워낙 유명했다. 왼발만 움직일 수 있는 뇌성마비 예술가의 삶을 눈물 겹게 표현한 영화 ‘나의 왼발’ 때부터 그랬다. 긴 머리를 휘날리는 모히칸의 용사가 됐던 ‘라스트 모히칸’과 15년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해야 했던 아일랜드 청년으로 분했던 ‘아버지의 이름으로’를 거쳐 ‘갱스 오브 뉴욕’에서는 무시무시한 도살자가 되기도,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는 탐욕으로 광기에 사로잡힌 석유업자가 되기도 했다.

 할리우드 관계자들은 그가 동시대인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배우로서의 선천적 재능을 유전자에 새긴 채 태어났다고 평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 세실 데이 루이스가 아일랜드 출신의 저명한 시인이었고, 어머니 질 발콘이 유명 배우, 외할아버지 마이클 발콘이 히치콕 초기 영화를 만든 영국의 대형 제작사 일링 스튜디오의 수장이었으니 그런 평가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 때문에 할리우드는 늘 그에게 무한 신뢰를 보냈고 그의 선택과 방식을 존중했다. 다작을 하진 않았지만 그런 만큼 사람들은 그의 영화를 항상 학수고대했다.

 그리고 바로 지난해, 그는 에이브러햄 링컨이 됐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링컨’을 통해서다. 지금까지 보여준 연기도 놀랍고 위대했지만 마치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걸어나온 듯 완벽히 링컨 전 대통령으로 변신한 그의 연기는 ‘기념비적’이란 평가까지 받았다.

 영국인인 그가 미국을 상징하는 인물인 에이브러햄 링컨 역을 맡는다는 게 어색하게 느껴질 만도 하다. 게다가 링컨은 전 세계인 대부분이 알고 있는 ‘위인’이었다. 처음 스필버그 감독에게 역할을 제안받았을 때 그가 망설였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영화 개봉 무렵 로스앤젤레스(LA)에서 열렸던 기자회견에서도 그는 당시의 심경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신화가 된 인물의 삶을 적절히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확신이 없었습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의 명성을 감당해내야 할 책임감도 너무 무거웠죠. 생각해 보니 링컨에 대한 사전 지식도 많지 않았습니다. 흔히 봐왔던 초상화나 동상의 이미지, 게티스버그 연설의 일부 정도밖에는 아는 바가 없었지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 대신 다른 사람이 해야 한다 생각하고 스필버그 감독의 배역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촬영 내내 영화 속 인물에 완전히 동화돼 생활하는 배우로 정평이 나 있다. ‘라스트 모히칸’(사진 위)은 미국 앨라배마 오지에서 촬영했고 ‘나의 왼발’은 뇌성마비 예술가 연기를 위해 휠체어에서 생활하며 찍었다. [중앙포토]

 스필버그 감독은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예스’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도 힘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처음 그가 링컨 역을 고사했을 때는 영화 자체를 접을 생각마저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스필버그 감독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여야만 한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아니라면 더 이상 내 인생에 ‘링컨’은 없다”고 못박은 채 8년을 기다렸다. 결국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역할을 승낙했다. “더 이상 내놓을 변명도 없었다”는 게 이유였다. “스필버그 감독이 그리고자 하는 링컨을 완성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속내도 털어놓았다. 토니 쿠시너의 시나리오가 훌륭했던 덕도 있었다.

 “토니의 시나리오 속엔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 사이에서 패러독스에 빠진 인간 링컨이 있었습니다. 제가 익히 알고 있던 위인전 속의 링컨이 아니었습니다. 집무실 안팎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그만의 삶의 리듬, 유머와 멜랑콜리에 점점 빠져들었죠.”

 그때부터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준비작업은 시작됐다. 스필버그 감독에게 1년의 시간을 청했다. 링컨을 흉내내기 위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냥, 링컨 그 자체가 되기 위한 시간이었다.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현존하는 최고의 ‘매소드 연기파’ 배우로 불린다. 자신이 맡은 역할에 완전히 동화돼 실제 그 인물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과정에서 내면의 감정까지 끌어내는 연기 스타일을 일컫는다. 그만큼 매섭게 배역에 몰입한다는 뜻이기도 한다. 매소드 연기의 궁극에 도달하기 위해 그가 보여 왔던 일종의 ‘기행’은 할리우드에서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나의 왼발’을 찍을 땐 휠체어에서 꼼짝도 않고 식사나 자리 이동을 모두 스태프들의 도움으로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라스트 모히칸’ 촬영 당시엔 앨라배마 오지에서 야영생활을 하며 실제 모히칸처럼 사냥해 잡은 음식만 먹는 집요함을 보이는가 하면, ‘아버지의 이름으로’ 촬영 때는 가혹한 심문으로 고통받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흘간 잠을 자지 않는 열정을 보였다. ‘갱스 오브 뉴욕’ 때는 촬영 중에도 틈만 나면 어두운 구석에서 가 소품으로 사용되던 칼을 갈면서 잔혹한 도살자 ‘빌 더 부처’ 역을 준비했다.

 ‘링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알아가면 갈수록 링컨이 그에게 접근하려는 나를 환영해 주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링컨의 목소리와 악센트를 구현해 내는 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 높고 부드러운 테너 톤의 목소리에 일리노이·인디애나·켄터키의 억양이 두루 섞인 말투로만 이야기하고 행동했다. 평소에 쓰는 영국식 억양은 흔적조차 없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캐릭터에 빠져들다 보면 정말 그 인물이 돼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럴 때면 문득 그 인물의 목소리가 제 귀에 들려오죠. 환청과는 다른 얘깁니다. 그 인물이 저에게 말을 건네는 거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목소리를 제 내면의 귀로 듣고 조금씩 따라해 보는 과정 속에서 링컨의 연기도 탄생했습니다.”

 스필버그 감독은 “영화 촬영이 시작되기 전 대니얼이 소형 녹음기를 보내온 적이 있다. 재생해 보니 그가 읽은 링컨의 연설문이 녹음돼 있었다”는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한 번도 직접 들어본 적은 없지만 링컨의 목소리가 이 톤과 똑같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전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도 자신의 본명이 아니라 에이브러햄 링컨의 ‘A’라는 이니셜을 썼다. 세트장에서도 늘 정장 차림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대니얼’이라 부르지 않고 ‘미스터 프레지던트’라고 불렀다. 완벽한 위엄과 부드러운 인성, 강인한 리더십과 인간적인 고뇌를 겸비한 영화 속 링컨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번 영화는 대니얼 데이 루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첫 만남이었다. 그간 짐 셰리던, 마틴 스코세이지 등 유명 감독들과 여러 차례 함께 했던 그에게도 스필버그라는 거장과의 만남은 특별했다.

 “스필버그 감독은 열린 사람이었습니다. 체계도 확실했죠. 창의적인 일을 하는 데 있어 가장 필요한 두 가지 덕목을 갖추고 있으니 정말 강력한 힘이 나오는 듯했습니다. 자신감도 넘쳤고요. 주변 사람에게까지 에너지를 전해 주는 그런 자신감이었죠.”

 둘은 찰떡 궁합으로 통했다. 스필버그와 수십 년을 함께 해온 제작자 캐슬린 케네디가 “스티븐이 현장에서 배우와 이처럼 긴밀하게 의지하며 일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다.

 ‘링컨’은 오바마 대통령이 대선 직후 백악관에서 특별 상영회를 열고 관람했을 만큼 미국 정가에서도 잔잔한 파장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수많은 반대와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역사의 진보와 인권 신장을 위한 신념을 꺾지 않았던 영화 속 링컨의 모습이 지금의 미국인들이 지도자들에게 바라는 바와 일치한다는 평가가 줄을 이었다.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지난 연말 시사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링컨 역할을 연기한 것만으로도 오바마 대통령이 평소에 느끼는 부담을 체감할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요즘 보니 그새 오바마 대통령이 눈에 띄게 나이가 들어 보이시더군요. 저는 대통령을 연기했다는 것만으로도 제가 급격히 늙어버린 것을 체험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과 배우인 저를 비교할 순 없지만 그만큼의 책임감과 위치를 감당해야 할 사람의 외로움은 너무도 깊고 힘들 겁니다.”

 그는 “‘링컨’을 촬영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 또한 무시무시한 외로움에 시달려야 했다”며 “하지만 그 외로움은 나에게 꼭 필요한, 큰 도움이 된 외로움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외로움과 고독마저 연기로 승화시킨 대니얼 데이 루이스에게서 영화 ‘링컨’이 탄생한 셈이다.

이경민 LA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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