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과 이렇게 다른 영화 '바닐라 스카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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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영화를 아주 뒤늦게 볼때가 있다. 영화가 지나치게 언론이나 세간의 관심을 모으는 경우가 그렇다. '베스트셀러' 기피증이 있어서 그런지 너무 화제가 된다 싶은 영화는 일단 피하는 버릇이 있는 편이다. 나중에 천천히 봐야지, 하는 기분이 드는거다. '오픈 유어 아이즈'(1997)는 대단한 흥행작까지는 아니었지만 이 영화도 늦게 본 경우다. 원작을 최근에 봐서인지 이 영화를 리메이크한 '바닐라 스카이'와 비교하긴 쉬울지도 모르겠다.


'바닐라 스카이'는 줄거리가 '오픈 유어 아이즈'와 거의 겹친다. 출판사를 상속받은 데이빗은 여성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 데이빗은 줄리를 단순한 친구이자 섹스 파트너로 생각하지만 줄리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생일 파티에서 친구 브라이언과 동행한 소피아를 만난 데이빗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다. 이에 질투를 느낀 줄리는 데이빗을 싣고 차를 몰다가 동반자살을 시도한다. 데이빗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지만 자신의 팔과 얼굴이 심하게 손상된 사실을 알고 경악한다. 영화에서 현대판 '미녀와 야수'의 분위기를 감지하기란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바닐라 스카이'는 출연배우인 톰 크루즈, 페넬로페 크루즈의 연인설로 화제가 되었다. 원작인 '오픈 유어 아이즈'에서도 출연했던 페넬로페 크루즈는 같은 캐릭터를, 스페인어가 아닌 영어로 소화하고 있는데 영어 억양이 특이한 탓에 역을 매끄럽게 소화하진 못한 것 같다.

흥미로운 건, 카메론 디아즈가 연기한 줄리라는 캐릭터다. 카메론 디아즈가 출연작을 고르는 방식이 독특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이 영화에서도 카메론 디아즈는 영화를 못본 사람이라면 '과연 그녀가 왜 이런 사소한 역할을 맡았을까?'하는 의문을 들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줄리라는 역할이 (다른 캐릭터들이 원작과 거의 달라진 바 없는, 혹은 덜 매력적인 인물로 변화했다면) 발하는 빛이나 그녀 캐릭터가 갖는 설득력을 감안한다면 이번에도 카메론의 선택은 옳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동반자살할 생각으로 자동차를 거칠게 운전하면서 한때 연인이었던 남자에게, 강박적으로 그를 사랑하는 여성 심리를 단적으로 내뱉는 장면은 에너지가 굉장하다.

줄거리를 보면 알겠지만 '바닐라 스카이'는 원작에 충실하다. 원작을 거의 손대지 않고, 줄거리 뿐 아니라 중요한 장면들까지 그대로 옮긴 흔적이 역력하다. '오픈 유어 아이즈'는 스페인 출신인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출세작이었다. 알레한드로 감독은 주로 스릴러와 공포물을 작업하곤 하는데 히치콕 감독을 영화 스승으로 모신다는 감독은 '오픈 유어 아이즈'에서도 히치콕 감독의 영향을 숨기지 않는다.

이 영화를 할리우드에서 다시 만든 '바닐라 스카이'의 연출자는 카메론 크로우 감독. 그는 "영화를 통해 현대인들이 겪는 정신적 여행으로 관객을 초대하려고 했다. 밀레니엄 시대의 사랑과 성에 관한 의미를 통찰하고자 했다"라고 연출의도를 밝힌다. 기실 카메론 크로우 감독의 근작인 '올모스트 훼이모스' 같은 영화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바닐라 스카이'는 약간 실망스러울 수 있다. 청춘영화나 음악영화에 일가견이 있는 카메론 크로우 감독에게 난해한 스릴러영화는 별로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바닐라 스카이'에서 카메론 크로우 감독은 무리하지 않고, '오픈 유어 아이즈'의 영화적 재미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단, 특이한 것은 영화에서 카메론 크로우 감독은 미국 대중문화에 관한 연출자의 애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는 사실. 올드팝에서 영화, 만화에 이르기까지 팝컬쳐의 영향을 자연스럽게 녹이고 있는 영화 '바닐라 스카이'는 대중문화가 개인들의 무의식 영역을 어떻게 점하고 있는가에 관한 재치있는 언급을 던진다. 이것이 '바닐라 스카이'를 '오픈 유어 아이즈'와 구분되도록 하고 있으며, 어쩌면 범작에 그칠수 있는 이 영화를 어떤 의미에선 구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때 여성 록커로서 이름을 떨쳤던 낸시 윌슨은 이 영화에서도 영화음악을 맡았다. 감독 카메론 크로우의 부인이기도 한 낸시 윌슨은 '바닐라 스카이' 뿐 아니라 '올모스트 훼이모스' 등에서도 함께 작업을 했던, 사이좋은 동료이자 부부관계를 과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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