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없어졌지만, 없어져서는 안될 것들의 목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어른이 돼간다는 건 자신의 시간을 오로지 현재 속에만 가두는 일이다. 다 자란 우리는 스스로의 과거에 냉담해한다. 흙투성이로 뒹굴던 동네 친구와 창피한 줄도 모르고 아랫도리를 드러낸 채 병원놀이, 소꿉놀이를 하던 그 시절의 꼬마 소녀는 이제 어딘가에서 딱 그 또래의 자식들을 키우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낯설게만 여길 것이다.

삶의 속도에 떠밀린 일상 소사들을 다시금 음미
그러나 완전히 잊혀지는 과거란 없다. 추억은 현재에 난 시간 속의 공동을 메우면서 우리들을 과거로 되돌려놓는다. 잊혀졌던 바지춤의 흙 냄새와 뜬눈으로 새우던 봄 소풍 전날의 설렘을 그때의 그 질감 그대로 느낄 순 없지만, 쫓기는 일상 속에서 불현듯 우리의 발목을 잡는 그것들은 삶의 속도에 떠밀린 일상 소사들을 다시금 음미하게 만든다.

김석종 ·손현주 ·유인경 ·윤성노 ·이영만 등 다섯 명의 『경향신문』기자들이 지난 1년간 연재했던 글들을 모은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마당넓은집)는 한 권의 두꺼운 사진첩과도 같은 책이다. 모서리가 헐어 허연 속지가 드러날 정도로 오래된 기억들을 담은 흑백사진이 조목조목 정리돼 있다.

뜨거운 조개탄 난로 위에서 숯이 돼버린 도시락. 마루 밑에 감춰둔 딱지. 졸업식 날이면 먹을 수 있었던 자장면과 탕수육 등 이제는 그닥 소중하지도 즐겁지도 않은 기억들이 결 고운 문장과 함께 아련히 떠오른다. 그 순간, 현재 속에 냉각돼있던 시간의 힘줄이 느슨하게 풀리면서 시선은 어느덧 일상의 지평 너머 기억의 먼 능선을 더듬게 된다. 그 아련한 능선 위로 떠오르는 추억들의 목록은 대략 이러하다.

놀이
그림딱지가 나오기 전까지 아이들은 종이로 딱지를 접어 따먹기를 했다. 자꾸 잃어 화가 나면 쓰지 않은 공책까지 찢어 딱지를 접다 어머니한테 혼나기도 했다. 아이들은 열심히 딴 딱지들을 뒤뜰이나 마루 밑에 모아두었다.

연애와 극장
달동네엔 3류 극장이나 2류 극장밖에 없었다. 3류 극장은 '쑈도 보고 영화도 보는’ 곳이었다. 동네 형들은 극장 포스터를 붙이는 공동변소나 시장통 가게를 돌아다니며 무료 초대권이나 할인권을 싸게 사 애인들과 극장 구경을 갔다. 극장은 컴컴했으니까 슬그머니 손을 잡아보기도 쉬웠을 터였다.

서리
밭고랑에 납작 엎드려 기기 시작했을 때는 조바심으로 가슴이 쿵쾅쿵쾅 지축을 울리는 듯했다. 노랗게 익은 참외는 밤하늘의 별빛만으로도 훤히 구별할 수 있었다. 훔쳐온 참외는 칼로 깎지도 않고 껍질째 다 먹어치웠다. 수박인 줄 알고 주먹으로 깨 한입 먹은 것이 호박인 일도 있었다.

각 단원 마지막에는 주제와 관련된 그 시절의 은어들을 세세하게 풀이한 '이런 말 저런 말’이라는 부록이 첨부돼 있다. 학교에서 기생충 검사용으로 나눠주던 ‘똥봉투’, 비닐봉지에 캐러멜 10개를 넣어 팔던 '오리온 밀크 카라멜’을 일본식 발음으로 줄인 '미루꾸’, 중 고등학교 교문 앞에서 학생들의 복장을 단속하던 '기율부’, 심지어는 당시의 국민가수 '남진’에 대한 풀이까지 나오는 그 목록은 '잊혀진 서민들의 은어사전’이라 부를만하다.

다섯 명의 기자가 번갈아 쓴 글들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글이 한 사람이 쓴 것인 양, 문체도 분위기도 내용도 비슷하다. 기자들이 쓴 비슷한 테마의 글이라 그렇겠거니 싶지만, 그게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닌 듯 보인다.

속칭 386이나 475라 불리는 세대들의 공통된 기억들을 한 마당에 풀어헤친 채, 서로의 기억을 나누고 약간씩 편차가 있는 내용과 은어들을 주고받으면서 세대 전체의 육성으로 변화시킨 이 책의 화자는, 그러니까, 오늘을 사는 삼사십대 이상 성년들 전부인 셈이다. 그렇듯 이 책은 누군가 자기만의 기억을 얘기하면 '맞아, 그런 게 있었지!’라고 맞장구를 치며 또 다른 기억의 서랍을 뒤적거리는 소위 '어른’들 속에 감춰진 '철없는’ 모습들을 끄집어내고 있다.

생활의 여유는 생겼지만 마음의 여유는 잃어…
그렇다고 이 책이 하릴없이 낡은 사진만 뒤적거리고 있는 건 아니다. 이 책을 읽고 망연히 지난 시절의 '낭만’만을 곰씹고 앉아 있는 건 궁상맞은 일일 테다. 필자들이 과거의 사물들을 들춰내고 뭉그러진 세월의 그림자를 다리고 말려 첨단의 21세기 하늘 아래 펼쳐놓은 까닭은 바로 잊혀진 '마음의 여유’를 회복하기 위해서다. 약간의 비감마저 느껴지는 '책머리에’는 필자들의 이런 의도를 집약해서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참 많은 것을 잃었다. 잃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있지만 잃기 위해 애를 쓴 것이 더 많다. 덕분에 많은 것을 가졌고 먹고 살게는 되었다. 그러나 없어도 되는 것을 위해 없으면 안 되는 것들을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 생활의 여유는 생겼지만 마음의 여유는 잃고 말았다.”

잃어버린 마음의 여유. 그것은 현실의 굳은 각질 아래 흐르고 있는 따뜻한 시간의 핏줄기일 것이다. 수시로 되돌려 현실에 찌든 몸을 멱감아야 하는. (강정/ 리브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