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농민 눈치보는 '계란 등급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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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한 식품은 리콜이 되는데 계란은 안된다. 소비자들이 좋은 계란을 먹으려면 생산자부터 성의있게 선별 출하해야 한다."

한 유통업자는 계란품질 등급제를 서둘러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계란은 가장 즐겨 먹는 식품인데도 소비자들이 품질에 대해 알기 어렵다. 노른자위가 탄력이 있고 흰자위가 투명해야 좋다지만 깨뜨려 보기 전엔 확인할 수 없다. 대부분 계란에 생산일자가 없어 신선도를 파악하기도 힘들다.유통기한을 적는다지만 업자가 알아서 표시하기 때문에 믿음이 안간다.

계란은 먹을 수 있는 기간이 냉장상태에선 20~30일이지만, 상온(常溫)에선 7~10일밖에 안된다. 특히 배아(胚芽)가 자라는, 일종의 생물이라서 기온이 높은 여름철에는 쉽게 상할 수 있다. 더구나 냉장 유통비율이 10%도 안되고, 유통과정이 4~5일 걸리는 우리 현실에선 소비자들이 신선한 계란을 고르기 쉽지 않다.

소비자들의 바람과 달리 양계농가들은 계란품질 등급제의 확대 실시를 꺼린다. 품질을 구분하고 생산날짜를 표시하면 경쟁에서 밀리는 농가들이 도태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10월부터 전국적으로 실시하려던 것이 한곳에서 시범 실시하는 것으로 축소됐다.

양계농가들은 한우(韓牛)산업이 던져준 교훈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우루과이라운드(UR)협정이 발효된 1995년부터 쇠고기에 대한 품질등급제를 본격 실시하자 축산농가들은 힘들어했다.

그러나 이같은 노력은 시장개방 이후 국내 한우산업의 경쟁력을 지키는 밑거름이 됐다. 한우 농가들은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해 초음파진단기를 사용해 소의 육질을 파악한다.유전자 검사를 통해 고급육을 생산할 수 있는 소를 선별한다.

그 결과 올해 쇠고기 시장이 완전 개방된 상황에서도 한우고기 값은 사상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계란품질 등급제가 빨리 정착되면 수송기간이 긴 값싼 수입계란을 막는 '비관세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배로 수송해야 하는 계란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어렵고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수입업자들이 수입을 꺼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양계 농가들도 서둘러 소비자를 만족시켜야 시장을 지킬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농림부도 농민의 눈치를 보며 미적거리지 말고 경쟁력을 높이는 정책은 과감히 밀고 나가야 한다.

정철근 경제부 기자 jcom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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