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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기여류수필-폭우 속의 명상|박경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온종일 강아지들은 뜰에서 뒹굴며 장난질을 하고 숲속에서는 「실로폰」을 치는 것 같은 새 울음이 맑게 들려왔다. 이제 장마는 그치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밤이 깊어져서 그 무시무시한 폭우는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빗소리가 나기 무섭게 개울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마치 산울림처럼 들려오고, 그 사이로 아슴푸레, 아마도 마지막인 듯 싶은 합승의 「클랙슨」 소리가 들려오다.
산골의 물은 정말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평소 메말라 있던 그 무수한 줄기는 순식간에 개울이 되어 그것이 합쳐지는 큰 개울은 그야말로 장관이라고나 할까. 며칠전의 폭우가 쏟아졌을 때 집 근처 고압선에 벼락이 떨어진 일이 있다. 어머니 말씀이 벼락 떨어질 때만은 임금이나 상민이나 모두 한마음이라던가? 죄의식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러나 친구 K는 요즘 벼락이 흔한 것으로 보아 반드시 저주받은 사람에게만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보다고 했다.
그때 고압선에서 무엇이 터지면서 창문이 환해졌을 때 나는 방에서 뛰쳐나갔다. 그때 문득 생각한 것은 내 자신이 비루하다는 느낌이었다.
인간이 인간다운 이유는 바로 그 생명보전의 본능 탓이겠는데 비루한 느낌이 도는 것 역시 인간이기 때문인 것 같다.
강아지들이 뼈다귀 하나를 가지고 쟁탈전을 벌이는 광경을 미소로 바라보면서도 어느 집단에서 밥 한 덩어리로 인하여 육박전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혐오감 없이 들을 수가 없다.
높은 곳으로, 보다 높은 곳으로 향하려는 마음과 항상 지상을 배회해야하는 육체의 끊임없는 싸움은 인간에게 주어진 영원한 형벌인 것 같기도 하고 인간에게 크나큰 은총 같기도 하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소리, 산울림만 같은 개울물소리, 하수도가 깨어지고 북새가 휩쓸고 간 집 앞의 길은 오늘밤 더 패어서 더 깊은 계곡이 될 것이다. 빗소리를 들으며 이상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시간은 지체 없이 정확하게 사라지고 있다.
한순간, 순간이, 나 혼자만 무위하게 이 밤에 머무르면서 방향을 잃고 있다는 느낌이 때때로 스쳐간다. 모든 세계는 내 의식 속에 있노라고 오만한 착각에 빠졌던 순간, 쓰다말고 구겨서 내버린 종이뭉치만큼 무의미하고 무가치함을 느끼는 순간, 그러나 그것에는 다 여백이 있는 것이 평범한 인간이 아닐까.
저 개울가에 깊이 뿌리를 박고 묵시하는 듯 서있는 나무의 준엄함이나 광란하는 탁류의 장엄한 힘이나 신비스런 번갯불의 위력 앞에 참담한 패배를 되씹는 인간이면서도 한편 그것들을 지배하고 달래는 인간, 여기에도 여백은 있는 것 같다. 어떤 결정적인 것이 아닌….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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