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대약진운동 비판에 ‘자치통감’ 뒤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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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호 29면

열여섯 살 때부터 전쟁터를 누빈 펑더화이는 도시공작만 하던 저우언라이를 제일 싫어했다. 1955년 여름, 중난하이에서 총리 저우언라이와 함께 농촌 여성지도자와 환담하는 펑더화이(왼쪽). [사진 김명호]

1959년 여름에 열린 여산회의처럼 복잡한 회의도 없다. 회의 자료를 보면 볼수록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중국인들을 많이 봤다. 중공 지도부가 40여 일간, 산속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08>

여산회의를 계기로 중국은 극좌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문화혁명의 전주곡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가 마오쩌둥에게 보낸 편지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꼭 그것만도 아니다. 회의 초기, 참석자들은 우경화로 선회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엄청난 착각이었다.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에 문제점이 많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부정 당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7월 11일 밤,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뒤적거리던 마오쩌둥이 저우샤오저우(周小舟·주소주), 저우후이(周惠·주혜), 리루이(李锐·이열)를 숙소로 불렀다. 모두 마오의 비서 출신이었다.
저우샤오저우는 고지식한 편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마오쩌둥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이날도 회의 분위기와 대약진운동의 문제점을 이실직고했다. “다들 좌경화에 넌덜머리를 냅니다.” 마오는 시종 미소를 지으며 듣기만 했다. 불편한 기색이라곤 찾아보려야 볼 수가 없었다. 며칠 전 장칭(江靑·강청) 몰래 세 번째 부인 허즈전(賀子珍·하자진)을 만난 얘기까지 하며 히히닥거렸다.

이날 이후 저우샤오저우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마오의 심경을 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석은 좌경화를 포기했다.” 의론이 분분해질 수밖에 없었다.

소문을 들은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판공실 주임 양상쿤(楊尙昆·양상곤)을 불렀다. “떠도는 소문의 출처가 어디냐.” “저우샤오저우가 그러고 다닙니다.” “내 말을 전해라. 다시는 그런 말 입에 담지 말라고 당부해라.” 훗날, 국가주석 시절, 양상쿤은 당시를 회상했다. “마오 주석은 겉으로만 좌경화에 반대했다.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주석의 속내를 꿰뚫어 본 사람은 저우언라이가 유일했다.”

저우언라이의 판단은 정확했다. 전체 조장(組長)회의에 참석한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을 포기할 기색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마오의 내심을 파악한 펑더화이는 며칠을 뜬눈으로 새웠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마오의 거처를 찾아갔다. 머릿속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 저우언라이 욕을 한바탕 해댔다. 평소 펑더화이는 저우언라이를 “내시 같은 놈”이라며 싫어했다. 류사오치도 마찬가지였다. “혁명시절 어느 구석에서 뭘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여자 홀리는 재주 외에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천윈(陳雲·진운)과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만은 “신중국의 짱깨[掌櫃]답다. 살림살이를 잘한다”며 높이 평가했다. 두 사람이 여산에 오지 않은 것이 안타까웠다.

마오쩌둥의 경호원이 펑더화이를 막았다. “주석은 막 잠자리에 들었다.” 펑더화이는 발길을 돌렸다. 현대 중국과 펑더화이의 운명에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펑더화이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넋 나간 사람처럼 먼 하늘만 쳐다봤다. 옆집에 묵고 있던 전 총서기 장원톈(張聞天·장문천)이 지나가자 달려나갔다. 평소 가까이 지낸 사이는 아니지만 말이 통했다.

“文死諫, 武死戰”, 문신(文臣)은 윗사람에게 잘못을 고치라고 간언하다 삶을 마감해야 하고, 군인은 전쟁터에서 죽어야 한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먼 옛날부터 내려오는 정치격언이었다. 펑더화이는 회의 종결 하루를 앞두고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자원과 인력을 낭비하고, 혼란을 가중시켰다. 경험과 교훈으로 삼기에는 희생이 너무 가혹하다. 허장성세가 보편화되고 믿을 수 없는 기적들이 연일 지면을 메우다 보니 언론이 기능을 상실했다. 당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개인의 책임을 추구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진리에서 한치도 어긋남이 없는 내용이었다.

마오쩌둥은 노련했다. 펑더화이의 편지를 읽은 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이틀이 지난 7월 16일, 편지 옆에 “펑더화이 동지 의견서”라는 제목을 달아 인쇄한 후 회의 참석자들에게 배포했다. 동시에 회의를 일주일간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이어서 베이징에 있는 황커청(黃克誠·황극성)과 보이보(薄一波·박일파) 등에게 급전을 보냈다. “받는 즉시 여산으로 와라. 펑더화이 동지의 의견서에 관한 토론에 참석해라.”

진리는 하녀의 속성이 있다. 권위에 의존해야 빛을 발한다. 권위가 약한 진리는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둔갑한다. 대다수가 진리를 숭상하는 것 같아도 실상은 권위를 숭배하기 때문이다. 펑더화이는 이 점을 간과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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