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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탕을 변호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유럽」의 한국유학생하나가 사랑하던 애인을 잃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실연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싱거운 화제가 아닌 것은 실연의 그 이유에 있다. 사랑하는 「블론드」의 아가씨와 열정적으로 여름의 「바캉스」를 즐길 때 한국유학생은 무심코 보신탕이야기를 하고 만 것이다. 더위에 허덕이다가 그만 고국의 개장국 생각이 났던 모양이다.
아가씨는 그 말을 듣자 꼭 식인종을 만난 것처럼 두려운 듯이 외쳤다. 『개를 잡아먹어요! 정말 당신이 그 입으로 개를 삶은 「수프」를 마셨단 말예요?』 「쿼터·달러」(25전)의 온전한 잎만 가지면 멋있는 피서를 할 수 있다는 보신탕 자랑을 하다가 그 유학생은 사랑을 잃었다.
임어당의 말대로 아무리 개를 사랑해도 동양인은 어디까지나 주인의 입장에서 개를 다룬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견인 평등, 한 친구로서 개를 사랑하고 있다
음식을 같이 먹고 「키스」를 하고 같은 방안에서 잠을 자기도 한다. 심지어 유산을 상속하는가 하면 「베오그라드」같은 데에서는 견공이 주무시는 「개 호텔」이란 것까지 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서양의 개는 미장원 출입을 하고 죽으면 공동묘지에 묻힌다.
서양친구들은 보신탕을 먹는 우리를 야만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눈으로 볼 때 애인이나 친구를 대하듯이 개와「키스」를 하고 있는 견인평등의 서양친구들이야말로 야만인이 아닌가 싶다. 사람은 사람, 개는 개, 고자 님도 일찍이 말씀하셨지만 과공은 비례, 매사에는 분별이 있어야 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짐승을 사랑하는 것을 같은 사랑이라 해도 그 방식이나 태도는 서로 달라야 할 것이다. 우리가 보신탕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와 같은 침대에서 자는 그들도 별로 문화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변태적인 애정, 병든 사랑인 것이다.
「블론드」의 아가씨여, 개장국을 먹는 한국인을 너무 탓하지 말라.
복날 무더위에 보신탕 한 그릇으로나마 피서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이해해 달라. 지금은 중복-당신도 한국에 태어났더라면 보신탕이나 먹으며 가난하고 따분하고 답답한 삼복의 무더위를 이겨내야 하는 그 사람들을 결코 흰눈으로 흘겨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잔인한 것으로 친다면 소 혓바닥 요리도 마찬가지가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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