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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중엽∼말엽 인물중심(20)-유홍열|국어학의 개척자 서파 유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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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유희는 양반집의 아들로서 일찍부터 온갖 학문을 닦고 여러가지의 책을 지었으나 60평생에 한번도 벼슬을 살지 않고 오로지 숨어서, 특히 언문이라고 부르던 우리 국문의 훌륭함을 연구하여 언문지라는 책들을 지어낸 국어학의 개척자였다.
그는 천문율려의 지식의 높았던 현감 유한규와 역사에 밝고 태고신기를 지은 여류문인 사주당 전주이씨를 어버이로 하여 1773년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말뫼(마산)에서 태어났다.

<양반집의 아들로 경기 용인서 출생>
처음의 이름은 경이라고 하고 자를 계중, 호를 서파 또는 방편자·남악이라 일컬었다.
이와같이 재주가 뛰어난 양반집의 아들로 태어난 유희는 천성이 또한 총명하여 나은지 열달쯤되던때 부터 어진 어머니의 말귀를 잘알아듣고 방 한구석에 굴러 있던 실꾸러미를 입에 물고 기어와서 실을 감고 있던 어머니의 품에 기어올라 젖을 먹었다 한다. 그러나 그는 첫돌때를 전후하여 무서운 마마병(천연두)에 걸려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고 이로 말미암아 곱던 얼굴에는 그 자국이 남게 되며 걸음배우기, 말배우기도 늦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어머니는 그가 글을 배울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던끝에 젖을 먹이다가 보고 있던 책속의 「일」자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한일자란다』라 하였다.

<「일」자 가르치자 다음부터는 척척>
이 말을 듣고 그는 건넛방으로 기어가 한권의 책을 입에 물고 돌아와 어머니에게 『이거 이거』라고 말하면서 한일자를 모두 손가락으로 짚어보였다 한다. 이리하여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글을 배워 9세때까지에는 중국의 통감과 사기를 모두 외고 서전을 연구할 정도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는 11세때에 뜻밖에도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두 누이를 모셔야할 집주인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가난에 쪼들리면서 외로운 살림을 하여가게 되었으나 그는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스승을 찾아 온갖 학문을 닦고 연구한 바를 적어두는데 힘썼다. 그는 특히 우리나라의 문자·역사·지리·경제 등을 연구하여 1805년쯤에 주영편이라는 2권책을 지어낸 정동유(동유)에게 글을 배웠다.

<김씨 세도를 짐작 단양으로 피신도>
이러한 사이에 1802년부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백성을 착취하기 시작하고 거듭난 흉년이 닥쳐오게 되니 유희는 머지않아 큰 민란이 일어날 것을 짐작하고 1809년 37세때에는 홀어머니와 가족을 거느리고 충청도 단양으로 옮아갔다.
그런데 과연 2년후에는 평안도에서 홍경래난이 일어나 한때 나라안을 발칵 뒤집히게 하였다. 이 난은 이듬해에 가라 앉았으나 유희는 그후에도 거듭난 흉년이 닥쳐옴을 보고 그대로 단양에 머물러 살면서 아름다운 남한강가의 경치를 즐기는 한편 약초를 심고 농사를 일삼아 제법 넉넉한 살림을 꾸며가게 되었다.

<10년후 고향으로 언문지는 52세때>
이리하여 생활의 안정을 얻게된 유희는 1819년 47세때에 고향인 용인으로 돌아가 책을 다시 엮고 정리하는 일에 힘쓰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2년뒤인 1821년에는 스승이며 어머니이던 이씨마저 여의고 슬픔에 잠겨 몸은 더욱 수척하여지고 머리카락과 수염은 백설과 같이 희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있어서도 그는 꾸준히 학문을 연구하고 책을 엮는데 힘을 기울여 1824년 5월 하순 52세때에는 우리 한글연구사상 획기적인 언문지라는 1권책을 지어내게 되었다.
이보다 20여년이나 앞서 그는 그의 스승이던 정동유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 이 책을 엮게 되었다.

<스승 정동유에게 한글 우수성 배워>
『한문의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오묘한 것을 중히 여기지만 그렇게하면 그릇되게 해석하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글로 뜻을 적으면 하나라도 잘못볼 일이 없는 것이니 그대는 우리글이란 부녀자나 배울 천한 글이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라』
이 말을 듣고 그는 곧 스승과 더불어 몇달동안에 걸쳐 우리글에 대하여 토론을 거듭한 끝에 언문지라는 책을 지어냈었으나 그때 이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고리짝속에 넣어둔채 10여년동안 타향살이를 하게 됨으로써 이 첫번째 책을 엮게 되었었다.
그는 이를 크게 탄식하고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일찌기 최세진이 지은 사성통해라는 책을 얻어보고 다시 옛 기억을 더듬으면서 새로운 의견을 붙여 엮어내게 된 것이 바로 오늘까지 남아있게 된 언문지였다. 그는 이 책의 끝에서 우리 글이 한문보다 뛰어난 점을 두가지를 들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질서있는 발성법 간결한 한글설명>
첫째로 한자는 모양이 복잡하여 한가지로 만가지를 미루어 살피지 않으면 안되는 글이지만 우리 글은 초성·중성·종성이 서로 질서있게 어울려서 어긋남이 없으므로 어린 아이라도 모두 쉽게 깨달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둘째로 한자는 오래가면 갈수록 뜻과 소리를 적을 글자의 수가 늘어가게 마련이지만 우리글은 일정한 수의 글자로 얼마든지 새로운 뜻과 소리를 적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한문을 높이 여기면서도 우리글은 천하게 여기는 이유가 글을 잘짓고 못짓는데 있기 때문이란 말인가. 기억하기에 어렵고 쉬운 것을 가지고 높이 여기거나 천히 여기거나 하니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어머니뜻 받들어 일부러 회시 낙방>
이렇듯이 우리 한글의 훌륭함을 책으로 엮어낸 유희는 그 다음해인 53세때에는 작은 누이의 거듭한 권고에 못이기어 소과초시를 치러 합격하고 4년후에는 회시를 보았으나 죽은 어머니의 교훈을 저버릴 수 없어 급제하지 않는 길을 가리었다. 이리하여 그는 한평생에 한번도 벼슬길을 밟음이 없이 오로지 숨어서 학문을 닦고 책을 엮는 일에 힘쓰다가 1837년에 65세로 용인 남악의 새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65종 백여권 저서 「문통」에 한묶음>
그의 저서로는 65종, 백여권이 있었는데 그것은 중국의 사서오경에 관한 것과 천문 지리 산학에 관한 것과 천려양전에 관한 것과 화학만물에 관한 것과 의약태고에 관한 것과 국문사서에 관한 것과 자신의 시문서독에 관한 것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는 이 많은 책을 「문통」이라고 이름지어 하나의 총서로 만들고 만년에는 이들을 정서하다가 이 일을 끝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그의 저서중 오늘날에 소개된 것은 언문지를 비롯하여 물명류고와 시물명고의 세가지 뿐이다. 명물류고는 이 세상의 여러물건을 곤충·수어 등의 유정류와 초목 등의 무정류와 토석수화 등의 부동류로 나누어 한글로 설명한 5권 책으로서 또한 근대적 자연과학 발달에 이바지한 책이다. <저자=문박·서울대 문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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