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오디세이] 前 신용금고 사장 김기선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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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S운수의 택시기사 김기선(金基善 ·58)씨.

39년동안 서울신탁은행,중앙 ·고려투금,동아증권,영풍상호신용금고를 골고루 거친 금융전문가인 그가 지난 10월 말 택시기사로 변신했다.

단자업계에 명퇴바람이 불어닥칠 때도 털끝 하나 다친 적 없을 정도로 역량을 인정받던 金씨다.1983년 영풍금고에 영입돼 세 차례 사장직을 연임하던 중 지난 8월24일 갑자기 사표를 냈고,두달 후 택시기사가 됐다.‘튀는 선택’에는 과연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까.택시 일을 시작한지 딱 한달째인 지난달 30일 金씨를 만났다.

#1.출근

삐딱한 의문이 먼저 들었다. 특별한 경력을 과시하기 위한 제스처는 아닐까? 아니면 갑작스런 퇴직 후 일을 놓은 초조함을 달래기 위한 돌발적인 결심이었을까?

어쨌거나 그에겐 낯설고 버거울 육체노동을 어떻게 해내는지 궁금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새벽 출근길 그를 기다렸다. 초겨울 바람 맵차기가 만만찮은 오전 다섯시의 어둠 속에서 그는 씩씩한 걸음으로 나타났다.

석달 전만 해도 직원 서른명을 거느렸던 전직 사장은 추레한 점퍼를 입고 아내가 새벽잠을 설쳐 챙겨준 빵과 물병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말투는 자신감에 차있었고 표정도 밝았다. 불황과 실직시대의 음울한 풍경화를 염두에 뒀던 예상은 빗나갔다.

사촌형이 하는 택시회사가 서울 다른 곳에 있긴 하지만, 온전하게 새 출발을 하고 싶어 집에서 가까운 회사로 정했다고 한다.

달리듯 빠른 걸음으로 10분. 회사에 도착했다. 교대시간이라 대기소 안에는 택시가 빼곡히 서있었다. 밤샘으로 뛴 전근무자들이 고무장갑을 끼고 걸레를 든 채 택시의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흔네살이라고 그가 귀띔해준 백발 노인도 보였고, 마흔 어름의 여인도 보였다.

입고온 점퍼를 벗어 트렁크에 조심스럽게 개어둔 뒤 그는 청색의 기사복장으로 갈아입는다. 청색은 법인택시 기사, 노란색은 개인택시 기사. 김기선씨는 지금 그 노란 옷이 무척 부럽다.

"원래 금고 사장직 임기는 내년이 만료가 되는 해입니다. 서둘러 나온 건 나름대로 계산이 있어서였습니다. 지금 몰고 있는 법인택시를 3년 몰아야 개인택시를 살 자격이 생기지요. 제가 지금 쉰여덟이니 삼년 뒤면 환갑 아닙니까? 그러니까 환갑 기념으로 개인택시 기사가 되는 게 지금으로선 가장 절실한 꿈입니다."

퇴직은 택시영업을 위해 스스로 취한 선택이었다.

# 2. 둥지

인사동에서 술이나 한잔 하며 편하게 얘기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꺾고, 그가 사는 곳을 방문하겠다고 했다.

사장직을 내놓은 뒤 퇴직인생을 살아가는 그의 집안 공기를 살피고 싶었다. 강남 서초동에 있는 그의 집은 서른평을 넘지 않아 보이는 검소한 공간이었다. 아내 김유계(金柳桂.54)씨와 둘째 아들 준호(俊皓.28.대학4년생)씨가 붙어앉아 시종 웃음 가득한 채 우리 대화를 함께 듣는다.

혹시 창피하다는 생각 안해봤느냐는 질문에 준호씨는 펄쩍 뛴다.

"처음엔 좀 이해가 안됐었는데, 아버지 용기 이젠 존경해요."

부산에 사는 첫째 아들 재호(在鎬.31)씨는 파일럿인데, 부자(父子)가 하늘과 땅에서 나란히 핸들을 잡는다고 웃었단다. 택시기사를 하게 된 속사정이 뭡니까?

기자는 이 질문부터 하고 싶었지만 슬며시 입을 닫았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김기선씨의 일성은 우리나라 노인정문화에 대한 따끔한 일갈이었다.

"노인들이 할 일 없이 모여앉아서 고스톱이나 치고 싸움이나 하고 며느리 흉이나 보는 그런 공간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어요. 이 사회가 노인들을 공경한답시고 그런 자리를 마련하는 모양이지만 그건 공경하는 게 아니고 삶을 더욱 쓸쓸하게 만드는 겁니다. 전에 일본에 가보니 노인들이 구두닦이도 하고 여관 벨보이도 하고 그러는 게 참 보기 좋더군요. 늙어서도 일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진짜 노후대책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만히 보면 65세 이후는 갈 곳이 없습니다. 어디서나 퇴물 취급이지요. 명퇴자들이 불행해지는 건 돈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세상에서 쓸모없어졌다는 기분 때문이 아닐까요?"

금고사장 시절부터 그는 주위사람들에게 퇴직후에 택시기사를 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당시엔 모두 웃어넘겼지만, 그는 지금 그 길을 당당하게 가고 있는 것이다.

"젊은 사람이 택시기사 하겠다면 말리고 싶습니다. 솔직히 비전이 있는 건 아니거든요. 급여도 살림을 감당하기에는 숨차고. 그러나 명퇴하신 분들에겐 이 일을 추천하고 싶어요. 찬물에 걸레를 빨고 입김을 호호 불어 차유리를 닦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하지만 저도 해내지 않습니까? 눈높이만 좀 낮추면 절대 후회 안합니다."

"택시기사 되는 것, 쉽지만은 않습니다. 자격시험도 있고요. 그거 합격하면 사흘 연수도 받고… 또 적성검사도 하루종일 합디다. 그런데 택시운전 자격이 생기니까… 내 생애에 그렇게 내가 인기좋았던 건 아마 처음일 겁니다. 교통회관 앞으로 나오는데 한 백명은 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나를 데려가려고 아우성이더군요. 다 택시회사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환갑 다된 퇴직자를 그렇게 환영하는 데가 어딨겠습니까. 제가 듣기론 여든을 넘긴 분으로 개인택시를 하는 분이 전국에 1백50명 쯤 된다고 하더군요. 택시는 엑셀러레이터 밟을 힘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그는 요즘도 택시일을 쉬는 날엔 전 직장의 고문으로 나가서 일을 한다. 그가 준 명함엔 택시기사 김기선이 아니라 영풍금고 고문 김기선이 적혀 있다. 오랫동안 트레이드 마크였던 금융맨에 대한 당연한 애착일까. 혹은 많은 예찬에도 불구하고 택시기사란 직업은 명함으로 내놓기에는 이 사회에서 재미없는 일이기 때문일까. 하긴 나도 그를 현직인 기사님으로 부를 수 없었다. 전직인 사장님이 덜 어색했다.

아참, 첫 월급은 받았습니까.

"아직 못 받았습니다. 다음달 10일날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글쎄요. 이것저것 포함하면 한 1백50만원 될까요□ 얘기 듣기론 휴일날 안 쉬고 뛰면 그 돈에선 사납금은 안 뗀다고 하더군요. 한달에 네번 정도 그걸 하면 50만~60만원이 생긴다고 하더군요. 지리를 좀 익히고 익숙해지면 그것도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저녁 무렵부터 시작한 대화였는데 벌써 밤이 이슥해졌다.

#3. 택시안

그의 곁에 앉아 아침 강남 일대를 돈다. 택시 안에는 2천원어치 귤(30개) 봉지가 놓여 있다.

"손님들에게 일종의 투자를 하는 건데 효과가 있습니다. 혹시 제가 초보라 길을 잘못 들어도 손님들이 이해해주는 건 이런 서비스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사실 택시승객은 한번 타고 내리면 다시 못볼 분들인 셈인데, 그분들이 제 택시를 기억했다가 다시 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 하나의 조그만 친절이 택시기사 모두의 이미지를 좋게 하리라는 생각인 거지요. 손님들은 이런 일회성의 만남이란 특징 때문에 오히려 깊은 속내를 곧잘 얘기하기도 합니다. 귤을 내놓으면 사람들은 굳은 표정을 풀고 그런저런 얘기를 꺼내지요. 얘기를 들어주는 일. 이건 참 중요한 거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목적지에 왔는데도 얘기를 못 잘라서 잠깐 차를 세우고 얘길 듣기도 하지요. 얘기가 끝난 뒤 손님은 미안하다면서 요금에서 팁을 얼마 더 얹어주기도 하더군요. 물론 안받았지만 말입니다."

초보택시기사 김기선의 승객론이 이어졌다.

"가난한 사람들이 훨씬 인심이 후한 걸 느껴요. 노점상이나 새벽 음식점에서 일하던 사람들, 아파트 공사 인부들이 타면 좁은 샛길로 잘 안들어가요. 큰길에서 내려 걸어가면 되지요 하며 세워달라고 해요. 그리고 거스름돈도 잘 안받아가요. 수고하시는데 많이 버세요 하고 그냥 내리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넥타이를 말끔하게 맨 사람들, 차림이 요란한 부인들은 구석구석으로 집앞까지 가자고 요구를 하지요. 그리고는 차에서 내린 뒤 거스름돈 1백원을 받으려고 서 있습니다. 원칙대로 하는데 잘못이야 없지만 좀 씁쓸하긴 하죠."

더 많은 얘기를 듣고 싶었지만, 지금도 이미 오랫 동안 영업 방해를 한 뒤였다. 아쉽게 택시를 내렸다. 미터기를 왜 꺾지 않았느냐고 항의를 했지만 "얘기 들어준 것도 고마운데..."하면서 손사래를 친다. 아침 햇살이 환하게 밝아오는 강남터미널 근처에서 회색택시는 경쾌한 시동음을 잠깐 울리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글=이상국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isom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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