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오리 총리, 숭어 부총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2면

정선구
경제부장

물속에선 쉴 새 없는 갈퀴질, 물 위에선 태연하게 앙증맞은 모습. 벼 사이를 요리조리 다니며 똥을 누고 다니고. 그러다가 갑자기 무언가 낚아챈다. 3mm나 될까 한 벼물바구미다. 오래전 경기도 용인 원삼면 두창리에서 본 오리들이 그랬다. 놀라운 것은 오리들이 있는 논과 없는 논의 벼 차이. 오리 논 벼의 키가 훨씬 큰 게 아닌가. 물갈퀴질로 물살을 일으키니 마사지된 벼 뿌리가 튼튼해지고, 똥은 그대로 천연거름이 되니 독한 농약이 따로 필요 없다. 하도 휘젓고 다녀 논은 맑을 날이 없다. 그러니 물속 잡초들은 햇빛을 보지 못해 자연도태될 수밖에. 유명한 ‘오리농법’의 풍경화다.

 총리 인선이 난항이다. 새 정부는 여론의 집중포화를 원망한다. 하지만 그다지 억울해할 필요는 없다. 총리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 국민들이 호락호락 넘겨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천연거름을 배설하는 클린 이미지, 남이 안 보는 데서도 늘 벼를 마사지하는 덕행, 눈이 밝아 해충 잡는 데 귀신인 혜안, 흙탕물 논이지만 겉만 번지르르한 맑은 논보다 알찬 내실…. 또 동원되는 오리는 청둥오리와 집오리의 잡종이 사용되는데, 둘의 장점인 근성과 차분함의 결합인 균형 잡힌 시각. 나중에는 오리고기가 되어 농가 돈벌이로 활용된다고 하니 죽어서도 행하는 인(仁). 하찮은 미물(微物)도 이럴진대 아무리 총리감을 구하기 어렵다 한들 이 정도의 인물이 국내에 없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하다. 차라리 오리더러 총리 하라고 하지.

 국민 입맛이 너무 까다로운가. 하지만 총리는 장관과는 격이 다르다. 게다가 새 정부에서는 책임총리라고 하니 더더욱 그렇다. 인선이 힘들더라도 제대로 찾아보자. 대신 경제부총리와 장관에는 약간의 여백을 두자. 엄격한 잣대에 남아나는 인물이 없다는 현실을 어느 정도 이해해 준다고 치고, 인격은 총리보다 약간 떨어지더라도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길을 열어주는 현명한 사람이면 어떨까. 특히 우리나라 먹거리를 책임질 경제부총리가 그랬으면 좋겠다. 바로 겨울 숭어 같은.

 ‘겨울 숭어 앉았다가 나간 자리 뻘만 훔쳐 먹어도 달다’는 말이 있다. 겨울에 먹는 숭어의 맛을 기막히게 표현한 문구다. 월동을 위해 비축한 영양분으로 살이 통통하게 오른 숭어는 고급 회에 비해 혀에 살살 녹는 맛은 덜하지만 오도독 씹어 먹는 맛이 일품이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위를 편하게 하고 오래 먹으면 몸에 살이 붙고 튼튼해진다. 도약력도 뛰어나 꼬리로 수면을 치면 거의 수직으로 치고 올라온다고 하니 우리 경제에 이보다 더 좋은 부총리감은 없겠다.

 겨울 숭어가 제철 음식이듯 경제는 타이밍이다. 어떤 시점에 어떤 정책을 갖고 갈 것인가를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가령 사람마다 평가는 다르겠지만 김학렬 부총리는 박정희 정부 성장정책의 적임자였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산파역이었으며 포항제철 설립의 주역이었다. 선이 굵은 신현확 부총리는 또 어땠나. 박 대통령의 짜증에 아랑곳하지 않고 경제안정화정책을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1998년 김대중 정부 들어 부총리제가 없어지고 임명된 이규성 재정경제부장관. 그는 5월이 돼서야 첫 경제장관회의를 기분 좋게 주재한다. 그러나 박태영 산업자원부 장관, 김태동 경제수석, 강봉균 정책기획수석 등이 참석한 회의는 서로 간에 질책이 쏟아지는 엇박자 모습을 보였다. 이 장관은 “그만두고 싶다”는 불만을 토로했는데, 김 대통령이 김 수석과 강 수석 자리를 맞바꿔 버리며 교통정리를 해줬다. 힘을 얻은 이 장관은 이후 장롱 속 금모으기 운동을 펼치며 이듬해 5월 외환위기를 잘 마무리한 장관으로 박수받고 나간다.

 만약 강력한 강타를 먹여야 할 때 수비하고, 막아야 할 때 드라이브를 걸었더라면 그나마 오늘날의 경제기반은 마련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지금 우리 경제는 대외적으로는 국가마다 각자도생의 환율·통상전쟁이요, 대내적으로는 경기침체인 상황이다. 과거의 성공과 실패에서 보듯 요즘 실정에 딱 맞는 능력의 부총리가 절실한 때다. 총리와 부총리만 잘 뽑으면 장관은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봄 주꾸미 여름 농어 가을 전어가 줄줄이 낚일 테니.

정 선 구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