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묘지서 "용감한 이들과 하나돼 영광" 17년 된 산삼부터 초상화까지 선물 세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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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호 01면

“아웅산 고 치파데(아웅산 여사를 사랑합니다)!”

아웅산 수치가 본 한국, 한국이 본 수치

지난달 31일 광주광역시 치평동 김대중컨벤션센터 2층. 미얀마(버마) 민주화운동의 상징 아웅산 수치(68) 여사가 나타나자 복도를 메운 미얀마 교민들이 연호했다.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행사장으로 가던 수치 여사는 미소를 띤 채 발걸음을 돌려 그들에게 다가섰다. 경호팀은 당황했지만 수치는 교민들의 손을 일일이 잡으며 선 채로 즉석 간담회를 열었다.

한국에서 정치난민 지위를 받은 녜인 마웅 탄(32)은 “미얀마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경찰에 이를 뽑히는 고문을 당하고 한국 망명 뒤에도 고생 많이 했지만 오늘 수치 여사를 본 것만으로도 난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대전에서 왔다는 대학원생 에 에 트웨(39)는 존경의 의미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합장하며 절을 했다.

환대 열기는 우리 시민들 사이에서도 뜨거웠다. 박재희(12)양은 어머니를 졸라 전남 나주에서 달려왔고 송미덕(57·광주시 치평동)씨는 환영의 뜻으로 수치 여사의 사진을 들고 몇 시간을 서 있었다. 송씨는 “같은 여성으로서 수치 여사가 자랑스러운 마음에 나왔다”고 말했다. 수치 여사는 중앙SUNDAY 기자에게 “이렇게까지 환영받을 줄 몰랐는데 감격스럽고 영광이다”라고 말했다. 수치 여사는 또한 “한국은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뤄낸 드문 사례다. 버마가 배울 점이 많다”고 수차례 언급했다. 한 오찬 자리에선 “미얀마 사람들이 한국을 워낙 좋아한다”며 “한국이 하는 얘기는 (미얀마) 정부가 잘 들을 것이니 좋은 얘기를 많이 해달라”고 말했다고 한 배석자는 전했다.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1일까지 닷새간 한국에 머무른 수치 여사는 서울·평창·광주 등지에서 가는 곳마다 환호 인파에 휩싸이고 선물 세례를 받았다. 일반 시민에게서 받은 선물은 17년짜리 산삼부터 직접 그린 초상화까지 다양했다. 수행팀 관계자는 “선물들을 싸는 데 몇 시간 걸렸다”고 전했다.

수치 여사의 무엇이 이렇게 사람들을 끌어당겼을까. 아버지 아웅산 장군을 두 살 때 암살로 여의고, 자신은 군사독재정권에 15년간 가택연금을 당한 그의 신산한 삶은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에 지명됐지만 가택연금 상태여서 영국인 남편이 대신 상을 받아야 했다. 2004년 광주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됐을 때도 연금 상태였다. 2010년 11월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지 2년3개월 만에 뒤늦게 상을 받은 이유다.

수치 여사가 방한한 닷새간 그를 밀착 취재하며 눈에 띈 건 긍정과 희망의 리더십이었다. 지난달 30일 평창 동계스페셜올림픽을 계기로 열린 글로벌 개발 서밋 기조연설에서 수치는 “지적장애인 선수들이 뛰는 걸 보며 내 삶은 그들에 비하면 힘들다고 할 수도 없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내가 큰 희생을 치렀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아니다. 난 내가 직접 선택한 길을 걸어갔을 뿐이다.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지지자들이 있어 희망이 있었다. 선택권도 없고 희망도 없는 삶이야말로 힘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었지만 콘텐트엔 힘과 깊이가 있었다. 지난 1일 송영길 인천시장과의 면담 때 일본이 독일과 달리 과거사 사죄를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자 수치는 “서구와 달리 체면을 중시하는 아시아의 문화 때문이 아닌가 한다.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잘못이다. 깨끗이 인정하고 시정하는 것이야말로 용기 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1일 서울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교민간담회에 참석했던 처 처 우시(42)는 “수치 여사는 우리 모두에게 국모(國母) 같은 존재다. 수치 여사를 보며 내일은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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