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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누에에게 배우는 희망 행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08호 27면

새해 초 광명역에서 KTX 열차를 기다리는데, 이상한 자판기가 눈에 들어왔다. 2000~3000원짜리 문고판 책들이 유리 안에 진열돼 있었다. 바람은 매서운데 기웃거리는 사람조차 없고, 왠지 불쌍해 보여 시선 끌리는 대로 몇 권 골라 사줬다. 열차 안에서 집어든 책은 『다빈치의 마음 열기』였다. 불세출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쓴 우화라기에 호기심이 발동해 내처 읽었다. 번쩍 하는 대목이 있었다.

쉬지 않고 변화하는 자연계에서 나뭇잎 위에 누에 한 마리가 천천히 기어가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많은 동물이 있었다. 즐겁게 노래 부르고 폴짝 춤을 추기도 하고 심지어는 머리 위의 하늘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다니기도 했다. (…) 그러나 그는 다른 벌레들을 질투하지 않았다. (…) 그는 열심히 실을 뽑아 나무 위에 튼튼한 집을 지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천천히 기어다녔고 그 밖에 대부분의 시간은 집에서 기다렸다.

“내일부터는 어떻게 하지?” 그는 약간 조급한 마음이 들어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었다. 하늘에서 갑자기 대답이 들렸다. “인내하고 기다리거라.” 누에는 그 말을 믿고 꿈속에 빠졌다. 하루하루 지나가고 그가 깨어났을 때는 모든 것이 갑자기 변해버렸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과거의 모습이 아니었다. (…) 푸른 하늘을 멀리 날아갈 수 있는 오색찬란한 날개를 가지게 됐다. 지금 그는 자신의 새로운 이름에 자신감이 생겼다. 그 이름은 나비였다.

우리네 삶은 영락없이 누에의 그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을 때가 있다. 둘러보면 다들 뛰고 폴짝거리고 날아다니는데, 나만 엉거주춤 기어다니는 신세! 모두 저마다의 색깔로 신나는 노래들을 불러대는데, 나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꼴!
하지만 우화 속 누에 애벌레는 은근히 가르친다. 누에는 질투를 몰랐다. 그 대신 자신의 꽁무니에서 나오는 실을 뽑아 집을 지었다. 그리고 무작정 기다렸다. 이윽고 새 세상이 열렸다. 오색찬란한 날개를 가진 나비 한 마리가 춤추듯 창공을 날고 있었다.

이렇듯 자연은 온통 희망의 향연이다. 살아 있는 미물들은 하나같이 우리를 위한 희망 멘토들이다. 자연은 값싼 희망을 가르치지 않는다. 혹독한 기다림의 시간을 전제로 한 희망, 그러나 반드시 비상의 때를 맞이하는 희망을 가르친다.

자연은 저렇게 늠름하게 희망을 가르치건만, 요즘 ‘절망문화’의 기세가 드세다. 자살률, 행복도, 만족도, 암 발생률 등과 관련한 OECD 국가 통계 비교는 한국 사회의 침울한 참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연예인들과 스포츠 스타들의 연이은 자살은 마음 약하고 선량한 소시민들의 절망심리를 자극하고 있다. 스타 한 명의 자살은 평균 600건의 모방 자살을 초래한다고 하니 말이다.

저 속수무책인 절망문화의 확산을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 지식인들은 이를 ‘피로사회’ 증후군이라고 지적한다. 희망에 들뜨고 꿈에 부풀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앞만 보고 질주하다가 기운을 소진해 이 지경이 됐다는 것이다. 그들의 비판과 성찰에 100% 공감하면서 나는 다시 억지스럽게 묻고 싶다.
“그러면, 절망이 답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충분한 휴식과 치유와 충전을 이야기하는 것도, 궁극적으로 우리의 희망 행보가 계속돼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길고 긴 동면(冬眠)은 이제 전환점을 지나고 있다. 슬슬 기지개를 켤 때다.



차동엽 가톨릭 인천교구 미래사목연구소장. 『무지개 원리』 『뿌리 깊은 희망』 등의 저서를 통해 희망의 가치와 의미를 전파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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