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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로지] 소녀같이 청초한 김혜자

중앙일보

입력

시간이 흐르면 어떤 것은 삭고 어떤 것은 썩는다. 발효된 것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나고 퇴락한 것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난다. 40년 가까이 배우로 산 그녀에게선 아직도 소녀의 봉숭아 꽃물 향내가 난다.

두 부류의 노배우들이 있다. 부르면 기다렸다는 듯 다가오는 배우, 그리고 불러도 쉽게 답하지 않는 배우. 그녀는 뒤쪽이다. 인자한 양촌리 김회장 사모님을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그녀에게 다가간 신인 연출가는 자칫 실의에 빠지기 십상이다.

자애롭다기보다 그녀는 자유롭기 때문이다. 부풀려 말하면 조금 까탈스럽다. 하기야 그 긴 세월을 이 바닥에서 풍화작용을 겪고도 곧게(곱게) 살아남은 그녀가 아닌가.

그녀를 한국의 고즈넉한 어머니상으로 기억하는 일이 관습처럼 되어 있지만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못한다. 고쳐 말하면 그녀는 어머니역도 잘할 뿐이다.

그녀를 어머니로 가둘 수는 없다. 무대 밖의 김혜자. 오히려 그녀는 소녀의 이미지에 가깝다. 그게 실례라면 조금 양보해 소녀에서 숙녀로 가는 길목쯤으로 바꾸어도 좋다.

혼자서 주저리주저리 두 시간 가까이 세상과 자아에 대해 뒤틀린 심사를 토해내는 연극 '셜리 발렌타인'을 보고 나는 '느낌'보다는 '떨림'이라는 단어와 마주쳤다.

그녀라는 재료는 극 속에 아교질로 무르녹아 있었다. 일상의 식탁 앞에서 투정하건, 그리스 바닷가에서 일탈을 꿈꾸건 간에 그녀는 시종일관 자연스러웠다. 무대 위에 김혜자는 없었고 셜리만 있었다. 아무나 할 순 없지만 배우란 참 멋진 직업이라는 걸 나는 발견했다.

연극이 끝난 후 텅 빈 객석에 둘이 위아래 의자에 나누어 앉았다.

"어쩌면 그렇게 하실 수 있어요"하고 물었다. 여기서 '그렇게'란 아주 복합적인 단어다. 대답은 단순, 그리고 명료하다.

"죽기살기로 하는 거죠."

그렇다. 그녀는 죽기살기로 연기하는 배우다.

"TV에서 나의 설 자리가 좁아진다는 게 압박감으로 다가왔어요."

아, 이 사람은 참 얄밉구나(?) . 그녀가 출연만 해주길 바라며 그녀의 집 앞에 꽃 사들고 줄 서 있던 연출자들은 허탈할 것이다. 그러나 이해하자. 그녀는 익숙한 몸짓으로 '살기'가 싫은 것이다. 그 '연세'에 이렇게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니. 그녀가 청초해 보였다.

군데군데 그녀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닥 모를 때의 심연은 바로 네 곁에 있다'는 『페이터의 산문』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무대 위의 그녀를 보면서 그녀는 앓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은 그녀가 병을 자각하고 그 병에서 치유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으로 보였다. 자신의 병명조차 모르고 그것이 삶의 갈래인 줄 알고 죽어 가는 관객들이 멍하니 홀린 표정으로 한참 동안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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