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객의 동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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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드·골」이 「모스크바」에 도착하면, 32「킬로」 연도에 1백만명의 「환영시민」들을 늘어 세우고, 「일찌기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대환영」 소동을 베풀 계획이었다. 공산당이 하는 일이니까 인정 사정없는 계획 그대로였을 게다. 백만의 인산인해와 새로 칠한 건물번호며 「버스」 정류장 표지를 보면서, 「나폴레옹」이 미처 밟아보지 못한 「모스크바」에의 길을 간 「드·골」이, 그 소동을 「소련」 시민들의 자발적 환영의 표시라고 생각했을까. 동방의 접객법엔 「자발」이란 있을 수 없다. 전체주의가 떨어대는 수선이 크면 클수록 전체는 죽고, 한줌도 안되는 소수인형사들의 권모와 술수만이 네 활개치게 마련이다.
인권이 있고, 민주주의가 살아있는 서방의 접객법은 「모스크바」식과는 다르다. 1958년 여름에 영국 여왕을 찾아온 서독의 「호이스」 대통령의 행차를 구경한 적이 있다. 전후 10여년이란 세월이 지난 다음에도 독일인들에 대한 영국인들의 감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었다. 여왕과 나란히 마차를 타고 「빅토리아」역에서 「버킹검」 궁전으로 행하던 「호이스」 박사의 표정은 울적해보였다.
연도에는 근위병들이 늘어서 있고 시민이라곤 잠시 교통이 막혀서 부득불 걸음을 멈추고 지나가는 여왕과 국빈의 행차를 구경하게된 임의의 행인들뿐,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그 다음날 신문들은 다음과 같은 「고시프」를 전했다. 궁전에 여왕과 대통령이 도착했을 때, 「런던」주재 독일대사가 대통령에게 『의외로 많은 시민들이 각하를 환영했읍니다』라고 아룄다. 그러나 「호이스」 대통령은 즉석에서 냉전과 「유머」와 대인지풍이 넘치는 반응을 보였다. 『당치않은 소리. 그중 8할은 말을 보고 박수를 쳤고 1할은 자기네 여왕을 보고 박수를 쳤고, 나머지 1할이 나를 위해 박수를 쳤소. 그나마도 대개는 「런던」에 사는 독일인들이었을거요.』
서방식 접객법이 마냥 매정스럽진 않다. 6년전, 바로 이맘때 서울에 온 「아이크」가 받은 민주적 환영을 상기하자. 조직도 강제도 동원도 각본도 없이, 홍수와 같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던 장안의 시민들의 환영은 열광을 극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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