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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모각 낙성에 즈음하여-임창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우리 역사상 허다한 학자·공신·예술가·과학자 등 찬앙할 인물들은 이루 셀 수 없다. 그러나 나라가 위급한 경우를 당했을 때 그의 재치와 역량을 다하여 민족의 운명을 바로잡은 인물에 대하여 더욱 추모가 더하여 짐은 당연한 일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국난을 말할 때 임진란보다 더 큰 것이 없었고 임진란을 말할 때에는 무장 이순신장군과 함께 문신으로서의 서애 유성룡 선생을 언제나 상기하게 된다.
일직 퇴계선생에게 공부하여 주자학에 대하여 학자로서의 일가를 이루었을 뿐아니라 그의 문집에 나타나는 시와 문은 모두 논리에 장하며 서사에 있어서 논지가 정연하여 일견 그 내용을 명백히 파악할 수 있음은 정치가의 문장으로서 역대 여러 대가에 비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을 만큼 탁윌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우의정으로 병조판서를 겸임하여 군무를 총괄하였고 도제찰사로서 적의 방어에 최선을 다하였고 명군이 이르자 그들에게 물자 및 식량공급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일방 각 지방관리의 감독, 독려 등 실로 전시대신으로서의 모든 과업을 두 어깨에 메고 백가지가 모두 궁핍한 가운데서도 능히 그어려운 과업을 완수하여 안으로는 국내의 정치질서를 유지하고 밖으로는 외국응원군의 감점을 무마하여 나라를 위태한 관두에서 다시 일으켜 놓았다.
그가 정몽주의 포은문집 후기에서 『큰 건물이 기울어지려 할 때에 기둥 하나가 이를 버티어 나간다』하였는데, 지금 우리는 도리어 이 말을 선생의 공적에 대하여 바꾸어 칭송하려한다. 임진란 당시의 사적은 실록을 의시하여 허다한 문헌이 있으나 임진란 중에 창황히 기록한 것이어서 그 종류가 많은데 비하여 오히려 그 장세간 자료를 조사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은데 선생은 비록 난서라도 꼭 역서 (대통령)를 후대하고 매일의 일기를「메모하여 두었고 당신이 직접 집필한 장주문, 장계 등은 물론 승정원에서 내려온 교서, 명의 인사들이 보낸 서한까지도 이를 모아 기록에 남겨, 임란 전후의 기록의 전집이라 할 수 있는 「징비록」은 임란 자료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있어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일본에서까지 이를 복사하여 널리 전해지고 있다.
이것이 선생이 특히 문헌으로 점리하는데 대한 관심이 깊었던 점에서 이방면의 업적은 더욱 높이 평가되는 것이며 학자 정치가로서의 관록이 찬연하다.
이들은 모두 일제 때 조선사 펀수회에 의해 조사되고 또한 보물로 지정돼있지만 이만큼 소중히 보존해온 그 후손의 경성에 대해 경의를 표해마지않는다. 뿐더러 이제 다시 그 유물의 영구보존을 위해 새로 안동하회동에 영모각을 신축하고 11일 그 낙성식을 올리게 되니더욱 경하해마지않는다. 사역자 태간고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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