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꽃섬

중앙일보

입력

영화'꽃섬'의 배우들은 무슨 통과의례를 치른 듯 했다.

삶의 피로감이 뚝뚝 묻어나는 영화 속 인물들과 달리 시종일관 활달했다. 기자가 한마디를 물으면 두마디로 대답했다. 송일곤(30) 감독만이 균형을 잡는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의 표정이다.


'꽃섬'은 단편영화 '간과 감자'(1998년.서울단편영화제 최우수상) ,'소풍'(99년.칸영화제 단편 심사위원대상) 등으로 이름을 알린 송일곤 감독의 장편 데뷔작.올 베니스영화제 '현재의 영화'부문에서 관객상을,부산영화제 '뉴커런츠'부문에서 최우수신인작가상.국제영화평론가협회상.관객상을 탄 화제작이다.

반항기가 철철 넘치지만 원치 않는 태아를 화장실에 버리는 10대 여고생 혜나(김혜나) , 설암에 걸려 더 이상 노래를 할 수 없는 20대 뮤지컬 배우 유진(임유진) , 딸에게 피아노를 사주려고 몸을 파는 30대 주부 옥남(서주희) 등 신문 사회면에나 나올 만한 '벼랑 끝' 여성 세 명이 슬픔과 불행을 모두 잊게 해준다는 꽃섬을 찾아가 각자 상처를 치유한다는 줄거리다.

왜 그들은 그렇게 불행할까. 인물 설정이 극단적인 것은 아닐까. 그런데도 영화는 우리의 어두운 구석에 대해 목청을 돋우지 않는다. 가급적 역사성.사회성을 배제하고 세 여인의 희망찾기를 묵묵히 따라가는 로드무비 형식을 취하고 있다.

"어른들을 위한 우화로 보면 됩니다. 그들이 희망을 찾아 변해가는 과정을 동화처럼 꾸몄지요. 우화를 생각한 만큼 각 인물의 구체성보다 대표성에 앵글을 맞췄습니다. 현실적인 것과 마술적인 것의 경계를 허물려고 했어요. 그래서 과장된 측면도 있고 관객들이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또 세 명의 인물들은 한 여성의 일생을 연령별로 나눠놓은 영화적 장치에 해당합니다. 반항의 10대,실존의 20대, 어머니로 성숙하는 30대를 상징하는 것이죠."(송감독)

맏언니격인 서주희가 말을 이었다.

"결코 극단적인 인물이 아니라고 봅니다. 주변을 보면 10대 낙태,주부 매춘 등이 얼마나 횡행합니까. 그런 우리 모두의 아픔을 감싸안고 상처를 치유하는 여행에 동승을 권유하는 영화입니다."

'꽃섬'은 순제작비 4억5천만원(마케팅비 포함 8억원) 이 투입된 저예산 영화. 출연 배우 세 명 모두 영화는 처음이다.

하지만 서주희는 연극 '레이디 맥베스'와 현재 공연 중인 '버자이너 모놀로그'로 유명한 중견 배우며, 영화 속에서도 뮤지컬 배우로 노래를 부르는 임유진은 지난해 대형 뮤지컬 '드라큘라'에서 가수 신성우와 한 무대에 선 적이 있다.1백% 신인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3학년생인 김혜나 뿐이다.

이들은 각기 배경과 출신은 다르지만 지난 겨울 두달간 송감독과 하루 3시간을 못자는 '동계훈련'을 하며 누구 이상의 훌륭한 호흡을 보여줬다.영화계에 배우가 없다는 항간의 불평은 새로운 배우를 발굴하지 않는 제작사의 태만 때문이지 결코 배우가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아직도 동상에서 낫지 않았어요.무릎까지 푹푹 들어가는 눈밭에서 얼마나 고생했는데요"라고 막내 김혜나가 응석을 부리자 둘째인 임유진이 "그런 육체적 고통은 참을 만해.등장인물을 통해 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훨씬 어려웠잖아"라며 대꾸했다. 그래도 막내는 "(애를 낳느라) 화장실에서 18시간 동안 앉아봐요.정말 정신을 잃었다니까"라며 항변했다.

'꽃섬'은 배우들에게 힘든 작품이다.한컷한컷(숏) 을 따로 찍어 한 장면(신) 을 완성하는 대신 마치 연극처럼 중간 휴식없이 장면장면을 연속해 촬영했기 때문. 그만큼 오랜 시간 감정을 유지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나중엔 좋았어요.몸은 고달펐으나 극중 인물에 몰입하는 데는 최고였거든요."(서주희) .다른 두 명도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절대 연기를 끊지 않았어요.카메라는 단지 배우를 따라갔을 뿐이죠."(송감독)

그래도 개봉이 걱정될 것 같았다.최근 소위 '작은'영화들이 극장가에서 연패했다고 넌즈시 물었다."흥행을 먼저 따지면 영화가 아니죠.매일 저녁 씨네코아극장에서 관객과 대화할 겁니다"(송감독) , "웃기는 데도 많아요.예술영화를 가장한 코미디거든요"(임유진) .

18세 관람가. 24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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