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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탑 복원을 끝내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작년 11월 착공되어 해체와 사리 구의 수습이 끝났고 금년3월에 재개, 5월 말일로써 복원뿐 아니다 탑 주위의 발굴조사까지 전부 완료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전후7개월을 통하여 이 석탑에 관심을 모을 수 있었던 필자는 적지 않은 수확을 얻어 이 석탑에 한층 친숙할 수가 있었다. 아마도 석탑1기에 대한 공사와 조사로써는 해방 후 최대의 공비와 규모의 것이었는바 그에 종사한 여러 사람의 노고에 대하여 충분한 보답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첫째 이 석탑 제1층과 심초석에서 발견된 5개 사리 공에서 금판경과 유리제 사리 병을 포함한 이중의 금곤 또는 청동여래입상 등 그 중에는 초유의 유품도 있어 황금 찬란한 그 장엄이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석탑보수의 목적이 결코 이 같은 곳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리어 합체 내의 각부의 결구방식이나 그 양식적 특이점 및 다튼 건물 배치와의 관계 등에 대한 해명에 두어야 할 것인바, 이 같은 여러 가지 점은 동시에 그 복원을 위한 전제조건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둘째로 이 석탑에서 가장 분명하지 못하던 탑기토분의 발굴을 봉하여 원래 기단부를 이루었던 옛 석재가 확인됨으로써 단층기단으로서의 원형이 밝혀졌다. 동시에 8각형의 사우석주가 중심 각주와 더불어 드러남으로써 우리 나라 석탑에서 일찌기 그 유례를 볼 수 없었던 특이한 탑기양식을 보여주었다.
이 같은 양식은 목탑 계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이웃에 있는 백제 미륵사지석탑과의 친연을 말하여주는 것인바 이 같은 백제 시원 양식과의 계보는 그 지연성과 더불어 고대유구를 조종으로 삼은 이 탑연대에 대하여 재검토의 재료가 될 수 있었다.
세째로 이 석탑이 전립 되고 있는 지대가 예부터 고 궁궐지로 전하여왔기에 그에 대한 조사는 또한 이 공사와 병행하였던 발굴을 봉하여 부분적이나마 밝혀질 수가 있었다.
사실상 이 점이 이번 공사를 통하여 또 하나의 촛점을 이루기도 하였다. 탑주의 조사에서 백제하대로 추정되는 건물지를 노출시킬 수 있었으며 이때 수습된 명자고와나 석재 등을 통하여 위에 말한바와 같은 옛 궁궐터로서의 추정이 하나의 학술적 근거점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같은 발굴은 석탑공사에 따르는 매우 제한된 것이기는 하였으나 그와 동시에 실시된 이 석탑이 자리잡은 고대유지를 둘러싸고 있는 성지의 측량은 그 규모의 크기와 가치의 막중함을 새삼 느끼게 하였다.
끝으로 이 석탑 연대에 대해서는 종전에 막연하게 발설되었던 백제설이 근거를 잃게 되었다. 동시에 사리구와 결구 양식 또는 수습된 각종 자료등을 통하여 내외학자들이 거의 주장하여 오던 신라통일 초기설도 재검토되어야 함을 깨닫게 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이 석탑이 이루어지는 시대적 배경과 백제 미륵사지석탑을 지근거리에 두고 그와의 관계 등을 새로운 고찰점으로 삼아서 이 탑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가 다시 이루어져야할 것인바 이 것은 나아가 철산일대에 산재하고 있는 풍부한 백제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본격적 학술조사의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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