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이 슌지의 신작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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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감독의 신작을 기대하곤 한다. 아마도 이와이 슌지 역시 그중 한사람일 것 같다. ‘러브레터’에서 ‘스왈로우테일’ 그리고 ‘4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이와이 슌지 영화는 나름의 개성을 지닌다. 청춘영화, MTV적인 속도감, 아스라한 감성의 흔적. 국내에서도 이와이 슌지 감독이 나름의 팬층을 거느리고 있는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터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와이 감독의 신작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봤고 잠깐이나마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와이 감독은 전과 비교하면 살이 약간 오른 모습이었지만 어리숙해 보이면서 몽롱한 빛의 눈동자는 여전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이전 이와이 슌지의 팬이라면 의외로 여길 구석도 있다. 예쁘고 감각적인 영화란 것은 다를바 없지만 다소 영화의 톤이 어두워진 것. 원조교제와 이지메 등 도발적인 소재가 녹아들어 있다. 이런 변화에 대해 이와이 감독은 “현재의 일본 사회는 더 이상 변화를 바라기 힘들다. 한때 일본은 뭔가 금방이라도 바뀔 것 같은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달라질거 같지 않다”라며 영화에 대한 나름의 소감을 털어놓았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어느 중학생들 이야기다. 두명의 주인공은 유이치와 호시노. 유약한 성격의 유이치는 학년이 올라갈구록 주변 친구들에게 왕따와 이지메를 당한다. 그런데 호시노는 다르다. 오키나와에서 익사할뻔한 체험을 한뒤로 호시노는 폭력적으로 되어간다. 유이치에게 폭언을 일삼기도 한다. 유이치와 호시노 등은 릴리 슈슈라는 가수에게 집착한다.

그녀가 특별한 에테르를 뿜는 가수라 믿는 팬들은 그녀의 새로운 음반을 내고, 공연을 할 때마다 열광한다. 유이치가 속한 학급에선 유이치 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왕따와 원조교제 등을 경험하고, 유이치는 스스로의 내면 속으로 갇혀든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어느 여가수에 열광하는 어린 팬들에 관한 영화다. 팬들은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 속에서 그녀의 음악과 재능을 찬미한다. 그것 뿐일까? 영화엔 두명의 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이들이 나이를 먹는 것도 영화 속 드라마를 구성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이 있다. 이들의 외적 변화에 비해, 심리적이고 내적인 면은 거의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 유이치는 급우들에게 따돌림당하지만 인터넷에선 릴리 슈슈의 영원하면서 순수한 찬미자일 따름이다.

현실의 암울한 고통도 그속에선 별로 문제되질 않는다. 반면, 호시노는 조금 다르다. 겉보기에 담배를 배우고, 폭력적인 학생이 되어감에도 가상공간 속에서 그는 전과 달라진 점이 거의 없다. 포커페이스, 즉 자신의 실제 얼굴을 감춰가면서 호시노는 어른이 되어가는 거다. 영화에서 유이치는 결말에 호시노를 칼로 찔러 살해한다. 단순한 복수일까? 그보다 영화에서 아이의 살인극은 마치 ‘어른’이 된 친구에 대한 일종의 복수극처럼 그려진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이와이 슌지 감독 전작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성장하는 청춘들의 이야기이며 영화음악이 작품 전체를 영롱하게 감싸고 있고, 화면은 감각적이다. 그런데도 이전 감독의 영화들과는 뭔가 다르다. 비교하자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암울한 정서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까. 영화에 나오는 학생들은 누군가 누구를 미워하고, 그래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상대를 괴롭히는, 일종의 굴레에 갇힌 채 한없이 맴돌고 있다.

탈출은 인터넷을 통한 대화에서만 가능하다. 현실은 극히 비관적이고 출구는 없어보인다. 영화에서 유이치는 그가 한때 간접적으로 고통을 주었던, 그리고 오랜동안 흠모했던 여학생이 피아노를 치는 소리를 듣는다. 그녀가 피아노 연주를 멈추면 뭔가 얘기를 걸어야지, 하면서 교실 복도에 쭈그리고 앉는다.

과연 이들은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까? 인터넷이라는 가상이 아닌 현실 속에서 그들은 허물없는 대화를 이어갈수 있을까?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지나친 낙관도, 한없는 비관도 아닌 중간지점에서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이와이 슌지 영화가 여기서 어디로 뻗어나갈지는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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