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칼럼] 맬서스의 유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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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말리아는 기근과 내전의 나라이고, 그 기근은 가뭄과 사막의 산물로 알려졌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소말리아는 식량을 자급했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시작되면서 외화획득을 겨냥한 환금작물 경작이 강요됐다. 식량은 저렴한 수입 곡물로 충당했다. 허기진 배에 원조에 가까운 외국의 밀과 쌀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으리라.

그로부터 10년 만에 식량 자급은 식량 구걸로 돌변했다. 기아 구제를 돕는다는 장엄한 명분 아래 미국의 잉여농산물 수출이 소말리아의 식량농업 기반을 작살내고, 영양실조를 막겠다는 장엄한 명분 아래 유럽연합(EU)의 무관세 쇠고기 수출이 소말리아의 목축을 거덜냈다.

미국이든 유럽연합이든 고의로 소말리아의 생존을 파탄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을 터이다. 이웃을 네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받드는 그들이 그처럼 사악할 리가 없다.

*** 세계 곡물가격 상승 예측

구약의 요셉은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을 알아맞혀 나라를 기근에서 구했다. 20세기에 들어와 월드워치연구소는 1996년을 그 풍년과 흉년의 분기점으로 잡고 있다.

세계의 곡물 비축이 48일분으로 줄어들고, 시카고상품거래소의 주요 곡물가격이 사상 최고로 치솟고, 곡물 수출국 중국이 느닷없이 세계 제2위 수입국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어떻게 중국을-세계 인구의 5분의1을-먹여 살리느냐는 불안이 번졌기 때문이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타결 직후 일본 농무성은 1995년 현재의 곡물 증산 속도가 그대로 유지돼도 2010년 세계의 곡물가격은 20% 정도 상승할 것으로 예측했다. 환경 문제를 비롯해 다른 요인이 가세하면 가격은 2배로 폭등하고, 만성적인 영양 결핍 인구가 7억3천만에 달한다.

맬서스 목사의 '인구론'이 나온지 2백3년이 지났지만 그의 음울한 예언은 빗나갔다. 그러나 그 유령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일례로 농업 생산에 대한 국내 보조금 축소나 철폐 압력은 거래 왜곡을 막기 위한 시도라지만 사실은 '과잉 생산'을 막고 있다.

문제는 그것이 부자들한테 과잉이지 인류에게 과잉이 아니란 점에 있다. 생산은 제한하되 꼭 필요할 경우 직접 지원하자는 소위 직접지불제(blue box) 역시 미국과 케언스 그룹은 사실상의 생산 지원이라면서 철폐를 주장하고 나섰다.

값을 올리려니 생산을 줄여라! 남극에 뚫린 오존층을 들이대며 과학자들은 겁먹은 정치인들의 관심을 환경 지출로 돌리는 데 성공했지만, 인류가 굶는다는 전망을 들이대며 경제학자들이 아무리 정치인을 볶아봐야 좀처럼 지갑을 풀지 않으리라는 관찰은 유감스럽게도 사실일지 모른다.

남의 얘기 할 것 없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을 조인하면서 우리 정부는 그야말로 심기일전을 다짐했었다. 정권을 걸고 쌀 개방을 막겠다던 호언장담은 애꿎은 농림부 장관의 '모가지'로 뒷감당했다.

농어촌 구조개선기금과 목적세로 신설한 농특세까지 50조원을 투입해 우리 농업의 경쟁력을 회복한다는 야심적인 계획도 발표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쌀의 생산비 격차를 재협상 시점인 2004년까지 국제수준의 60% 정도로-미국 쌀 1백원에 한국 쌀 1백60원으로-줄인다는 약속도 들어 있었다.

목표 연도를 3년 앞둔 지금 국내 쌀값은 미국의 5백5%, 중국의 5백66%에 이르고 있다. 지난 정권이야 빌릴 머리조차 없어 그랬다고 치더라도, 머리 좋은 현정권은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다.

*** 쌀 관세율 5배로 올릴 판

그저께 세계무역기구(WTO) 제4차 각료회의가 폐막됐다. 그 선언문 취지대로 3년의 후속 협상을 거쳐 농산물 시장의 '실질적' 개방이 이뤄지면, 최소시장접근(MMA)으로 의무 수입량만 들여오던 쌀도 '예외 없는 관세화'에 따라 비관세 빗장을 완전히 열어야 한다.

관세로 쌀을 지키려면 산술적으로 5백% 이상 세율을 올려야 하는데, 미국과 중국이 아무리 착해도 이를 보고만 있을 턱이 없다. 그리고 일본이 돌아서는 바람에 힘이 빠졌고, 판을 깬다는 '왕따' 비난이 두려워 주장을 굽혔다니….

미국.유럽연합.일본.캐나다의 WTO 쿼드(Quad) 4인방이 온통 뒤흔드는 판에 우리가 좀 버틴들 무엇이 잘못인가?

농업에서 잃어도 다른 데서 얻는 것이 더 많다는 설교는 10년 전에도 귀따갑도록 들었었다.

무슨 수로 우리가 그 도도한 세계 조류를 거스르냐는 한탄도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 정말 지겹다. 그럴 때 슬기롭게 대처하라고 뽑아준 정부 아닌가?

정운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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