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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불신낳는「공약20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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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정치는 대중과 유리되어 있다.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어민은 정치에 무관심했다. 해방이 되고 독립이 되고 또 정권이 바꾸어지는 등 여러차례 정치적 변혁이 되풀이 되었으나 농어민은 가난을 숙명으로 체념하고 살 수밖에 없었다. 역대 정권과 수다한 국회의원들은 중농정책을 염불처럼 외었다. 그러나 중농정책도 가난이란 중압에서 농민을 해방시키지 못했다. 정부의 농촌시책은 일관성이 없었고 치밀하지 못했다.
58년 당시의 집권당인 자유당은 축산 장려책으로 각지에서 주축농 부락을 뽑았다. 경남 울주군 삼남면 주축 부락은 그 하나다. 정부는 축산자금을 대여하고 땅을 개간토록 했다. 그러나 축산자금은 곧 회수되고 개간한 땅도 불하 받지 못한채 이 주축농 부락은 축산이 없는 가난한 소작농의 마을로 전락했다. 공화당 정부가 하고있는 시책도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백만안정 농가 형성책은 그본보기-. 농협 진주시 지부는 진주시 신안동에 안정농가37호를 세웠고 계획대로 성공했다.
그러나 진주농협은 선정대상을 정부가 지시한대로 1천5백평의 소농으로 하지않고 사실상 안정 상태에 있는 중농을 선택했기 때문에 안정농가를 육성시킬수 있었을뿐이다. 정부의 지시에 충실했던 농협섬천 지부의 경우를 보면 10만원을 대여받아 안정농가 건설에 나섰던 소농들은 5년뒤 원금을 갚기 위해서는 땅을 팔아 역시 소농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귀농 정착사업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군시 유랑민을 개간보조비와 구호양곡을 주어 유휴지를 개간시켰다.
그러나 개간보조비와 구호양곡이 끊어지자 이들 개척의 역군들은 다시 땅을 팔고 유랑의 길에 올랐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수지를 계산할줄 몰라야 한다는 말에 통하고 있는 것이 실전이다. 농촌에서「품팔이」하면 추수때 벼 일곱섬을 받는다. 돈으로 환산하면 2만1천원-이것이 1년의 노임인 셈이다. 농민은 농비를 빌어 쓸 때 월5푼의 이자를 치러야한다.
그러나 농토가 벌어들이는 연간소득이 5푼에 불과하다. 관청의「데스크」에는 농촌의 성장이 그려졌고 이 성장을 토대로 또 다른 시책이 나온다. 그러나 애초부터 틀리게 출발한 시책은 실패를 되풀이 해왔다.
농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부는 통통배와 낙후된 어구로 끼니를 이어왔다. 보다나은 어구나 어선을 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돈의 여유가 없었고 정부의 뒷받침도 없었다.
최근에 이르러 평화선이란 울타리가 사라지고 연안어족이 메말라 가자 큰 바다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큰바다를 달리는 일본의 대형어선과 발달한 장비앞에 두손을 들 수밖에 없는 초조한 상태다. 청구권자금·어업근대화등 벅찬 얘기들이 들리기는 하지만 실감을 갖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의 영세어민 들이다.
어민들은 당장 정부의 보조없이는 그나마 간신히 지탱하던 생업마저 잃게되는 위협앞에 서있다.
전남 마천군 사곡리의 김길구씨는『일본 어선 틈에서 고기라고 잡아 끼니를 잇자면 어선과 어구를 개량할 돈을 정부가 보조해 주지않아서는 안되겠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어부들은 10년동안 사용해온 누더기 어망을 그대로 쓰고 있다. 이래서 한번 출어 했다가 돌아오면 1주일동안 어망 땜질을 해야한다.
통통배 10여척을 갖고있는 선주 조남수씨도『영세어민에게도 자금보조가 없으면 모두가 생업을 바꾸어야 할판』이라고 울상이다. 『농어자금이 발전의 바탕이 될만큼 대여되고 비료가 적기에 공급되고 쌀값이나 떨어지지 않게 해주었으면…』하는 소박한 농어민의 바람조차 채워주지 못한 정치가 20년을 계속했다. 화려한 공약은 언제나 공약으로 사라졌다.
농어민은 정치에서 성실성을 찾지못했고 이 때문에 정치전부를 불신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대중과 유린되고 대중속에 침투하지 못했던 정치는 기초가 없었다. 농어민의 눈에 비친 지금까지의 정치- 공허한「이미지」투성이의 정치를 성실로 채워야 할것 같다. 농어민의 소박한 소망 앞에 정직하고 성실한 정치, 이것은 우리의 헌정기반을 구축하는 가장 중요한 작업의 하나이겠다.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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