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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Sunday] 빈 칸으로 남은 발인 날짜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06호 31면

18일 예정됐던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에 대한 158억원 손해배상청구소송 선고가 연기됐다. 부산지방법원 최환 공보판사는 “정리해고의 적법성, 158억원의 손해배상액과 파업의 상관관계에 대한 소명이 부족해 변론을 재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재판이 언제 끝날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노사갈등이 계속될 것이란 사실은 불 보듯 뻔하다.

이달 초 취재차 한진중공업 노동자 고(故) 최강서씨의 빈소를 찾았다. 그런데 발인 날짜가 적혀 있어야 할 안내판이 빈칸이었다. 금속노조 한진중지회가 고인의 명예회복, 노조 탄압 금지, 유족 보상, 158억원의 손배소 철회 등을 요구하며 장례를 무기한 연기해서다. 그걸 보고 있자니 ‘노사갈등해법’이라는 문제의 텅 빈 정답 칸을 보는 듯 답답했다.

경제민주화가 시대정신으로 떠오르자 많은 이가 해답을 찾고 있다. 가장 흔한 답안은 ‘노사가 한 발짝씩 양보해 타협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이상적이다. 한 발짝 씩의 양보와 타협은 동등한 힘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데, 지금의 노사관계가 동등하다고 단언하기가 어려워서다. 거대 노조가 존재하고 있으니 노사는 이미 동등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든 기업에서 그렇다면,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회안전망이 부족한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노동자 해고가 쉬운 환경이 힘의 불균형을 부추기는 것은 아닐까. ‘한 발짝씩 양보하라’는 이상적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다.

2002년 10월 대우차 인수 이후 3년 만에 흑자를 내고 정리해고 근로자 1725명을 다시 복귀시킨 GM대우의 닉 라일리 당시 사장. 그는 “노사관계가 나빠지는 건 70%가 경영자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노사관계에서 회사 측의 책임과 노력을 강조한 말이다. 그는 한 달에 두세 번 이상 노조위원장과 만나 회사의 주요 사안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GM대우의 이성재 당시 노조위원장은 “경영진이 대화로 노사관계를 풀겠다는 태도를 보여 상생을 이끌어냈다”며 라일리 전 사장을 치켜세웠다. 노조의 부당한 요구에까지 고개를 끄덕이란 게 아니다. 충분히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회사 측이 더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정치권의 역할도 중요하다.기업 내부 문제로만 치부할 게 아니다. 한 가정이 제 역할을 못하면 중재자가 참여해 훈수를 두는 건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노사정위를 강화해 노사관계의 주요 쟁점에 대해 사회적 대타협으로 풀겠다”는 박근혜 당선인의 공약은 긍정적이다. 고 최강서씨의 부인 이선화씨는 “우리는 죽음의 대기표를 받아든 대기자다.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 한마디만이라도 해달라”고말했다. 절규에 가까웠다. 내일이면 최씨 사망 한 달째. 여전히 그의 발인 날짜는 빈칸으로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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